Written by. IN-AE
눈 앞엔 무덤이 있다.
땅으로부터 솟아오른 반구(半球). 당신의 불뚝 튀어나온 배일 수도. 아니 당신의 봉긋한 가슴일 수도. 아니면 금방이라도 튀날 듯한 당신의 눈깔일 수도.
관리되지 않아 무성한 잔디로 지저분하고, 비석은 이끼로 가득 덮여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다. 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다고, 그 오래지 않은 시간 방문자가 없음의 원망과 외로움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 누가 무덤을 짓는다고.
좋잖아.
뭐가 좋아.
옛날에 논술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그때 선생님이 이런 얘길 들려주셨어. 누가 외국인과 함께 탄 차를 운전하고 있었대. 근데 그 외국인이 창밖을 뚫어져라 보더래. 왜 그러냐 물으니까 창밖 어디서도 보이는 무덤들을 가리키면서, "한국은 죽은 자를 위한 나라인가봐"라고 답했다는 거야.
그래서?
멋있지 않아? 죽은 자를 위한 나라. 명절엔 꼭 들러서 술상을 차리고 절을 올리고 무덤가를 정리하잖아.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되는 것 같아.
그래서 무덤에 묻히고 싶다 말한 사람은 나였거늘. 내 말에 한동안 입을 다물었던 당신이 떠오른다. 오래도록 이별했던 내 눈앞에 이렇게 보란 듯이 무덤으로 나타난 의도는 분명하다.
내가 무정했던 걸까. 당신이 나약했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즘 세상에 누가 무덤을 짓는다고 비석까지 세웠을까.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었는지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남길 것보다 들을 것들을 더 기대했을 지도.
눈앞에 무덤이 있다. 당신의 모든 곳에 난 모서리를 조각내어 퇴적한 섬이다. 나의 말 가운데 도대체 어느 부분이 당신을 현혹했을까. 산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되는 것 같다는 부분일 것이다. 비석에 담긴 당신의 기대는 나의 가정에 근거가 된다. 당신은 몰랐겠지.
그 기대의 대가가 결국 이렇게 지저분한 잡초인 것을.
하.
그날의 침묵 뒤에 건네받은 비웃음을 똑똑히 전해주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야. 듣지 못하는 당신께, 보지 못하는 당신께 보란 듯이 말을 하지도, 눈물을 쏟지도 않을 것이다. 그게 약올리는 거지, 뭐겠어.
눈을 감았다. 마음을 정돈하고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뻗어 이 지저분한 잔디를 정리한다. 하얗게 생이 바랜 것은 뽑아내고, 제멋대로 솟아오른 삐죽머리는 잘라낸다.
아차.
문득 모든 행동을 멈췄다. 일순간 밀려오는 죄책감이 낯설다. 손의 노고를 몰라 뵙고, 그저 나 자신의 의식으로, 나를 위한 미관 때문에 당신의 하나 있던 외투를 찢어낸 것은 아닐까.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내복에 니트에 코트에 목도리에 양털 부츠에 장갑까지 옷이란 옷은 모두 껴입은 나조차도 신음하게 만든 칼바람이 불었다. 당신을 향해 불었다. 당신 곁에 섰다. 그것은 살링이는 무덤의 잡초와 미동 없는 나뭇가지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나의 죄책감은 바람보다 날카롭게 내 마음을 짓이긴다. 시선은 내가 당신의 머리에 낸 작은 구멍을 향한다. 그 직선에 이끌려 온몸을 던졌다.
둥근 무덤 위에 한껏 엎드린다. 바람이 노골적인 몸짓으로 당신 안에 가득 쥔 잡초들을 내려본다. 그리고 당신의 무덤을 본다. 소름이 쫙 끼치면서 죄책감이 가슴 안에 자리잡고, 팽창하고, 또 팽창한다. 온몸에 힘이 풀려 손가락 문이 열리자 처참히 뜯긴 잡초들이 파스스 흩어진다.
이 추운 겨울,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 당신은 고작 잡초로 견디고 있었을 텐데. 나로 인해 뜯긴 잡초 한 가닥마다 뚫린 무덤 구멍 사이로 한파가 침투했을 터다. 생전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겨울에 홀로 맞서기 위해 스스로를 양분 삼아 잡초를 일으켜 세운 당신을 이 칼바람이 노리고 있음을 당신의 무덤 위에 엎드려 몸소 체감한다. 비집고, 헤집고, 폭행하고 때론 몸짓을 늦추고 낮춰 날 회유하는가 하면, 포기한 척 물러났다 기습한다. 그럴수록 난 더욱 몸을 당신에게 밀착해... 정말로 바람이 물러난 뒤에도, 온몸에 담이 걸려 아파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뒤 눈을 떴다. 정신을 놓은 모양이었다. 해는 여전히 건재하고, 대신 바람이 물러나 다른 산의 나무들 사이로 질주하고 있다. 나는 담에 걸린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저 숨만 쉬었다.
후... 호... 후... 호...
들숨과 날숨의 박자에 맞춰.
몸통이 커지고, 작아지고... 피어나고, 쪼그라들고...
생각 없이 숨을 쉬다 믿을 수 없는 친근함과 다정함이 떠올랐다. 가만히 엎드려 숨을 쉬다보니 무덤 전체가 들썩이는 것만 같다. 나의 숨이 당신에게 스며들어 당신으로부터 재창조되는 것만 같다.
당신이 살아난 것만 같다. 내게서 받아 가공한 뒤 당신이 내게 돌려준 숨으로 하여금 나의 시간이 재생산된다.
안은 건 난데, 안긴 게 나였다. 이젠 숨을 쉬는 법도 잊은 채 당신이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아기처럼 받는다.
그제야 해가 지고, 당신을 제외한 모든 산이 살랑이고, 무덤 안에서부터 돋아나는 잡초들이 내가 낸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해가 지기 전, 마지막 구멍에 눈을 맞췄다. 혹시라도 당신을 그 구멍을 통해 볼 수 있진 않을까 했던 기대는 금세 돋아난 잡초로부터 거절당했다.
몸을 일으켰다. 해가 져 노을이 드리웠다. 이제 하산할 시간이다.
당신의 백지 비석에 이마를 밪췄다. 그 안에 있는 힘껏 숨을 불어넣는다. 언제든 당신이 여기 담긴 숨을 가져가 호흡을 멈추지 않도록. 그 어떤 바람에도 지지 않을 잡초를 길러낼 수 있도록.
나의 생명이 여전히 당신에게 머물 수 있도록.
이 비석에 담긴 숨이 다 떨어지기 전에 다시 찾아올게.
당신께 약속한 뒤 산을 내려간다. 바람이 다가와 서툰 내 걸음을 맞춰주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