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견디는 문장들 #223
우울증은 낯선 병이 아니다.
그것은 먼 곳에 있는 병이 아니다.
우리 곁에 있다.
누군가의 아침 인사에 숨겨져 있고
밝은 웃음 뒤의 침묵에 스며 있으며
"괜찮아"라는 말에 포장된 눈물 속에 머문다.
우울증은 가깝다. 때로는 너무 가까워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마치 자신의 그림자처럼 늘 함께하면서도 외면하는 존재.
심리학자 칼 융이 말했듯 “어두운 면을 직면할 용기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운명이 된다.”
우울은 억누르고 감추고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더 조용하고 단단하게 마음에 뿌리내린다.
우울증은 감정의 병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리듬이 무너질 때 생기는 내면의 파열이다.
식욕이 사라지고 잠이 오지 않거나 오히려 잠에서 깨고 싶지 않다.
과거에 즐겁던 일이 아무런 의미 없이 다가오고
매일이 똑같은 반복처럼 느껴질 때
몸이 무겁고 머리가 흐리멍덩할 때
마음은 이미 조용히 구조신호를 보낸 것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정동장애(Affective Disorder)’라 분류한다.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지는 생물학적 현상이기도 하다.
특히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물질의 감소는 뇌의 보상 회로를 둔화시키고 즐거움과 동기의 회로를 차단한다.
즉, ‘마음의 병’이면서 동시에 ‘뇌의 병’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마음의 문제는 마음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식의 말을 쉽게 던진다.
그 말은 높은 열이 나는 환자에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하는 것만큼 무책임하다.
우울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멜랑콜리(melancholia)’라고 불렀고
중세에는 신의 시험으로 여겨졌으며
근대에 이르러서야 정신의학적 진단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불행하다.”
우울은 슬픔이나 나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성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된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은 우울을 견디며 창조해 왔다.
반 고흐는 고통 속에서 태양보다 강렬한 해바라기를 그렸고
프루스트는 무너지는 기억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되살렸다.
그들의 작품은 우울이 병이 아니라 존재의 깊은 울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정신의학은 우울증을 다차원적으로 바라본다.
유전적 소인, 뇌의 생화학적 변화, 환경적 스트레스, 성격적 요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한 연구에서는 일란성쌍둥이 중 한 명이 우울증에 걸릴 경우 다른 한 명도 우울해질 확률이 50~70%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또한 조기 트라우마나 애착 결핍, 장기적인 스트레스가 신경망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즉 우울증은 마음의 약함이 아니라 정신과 신체, 환경이 함께 빚어내는 복합적 질환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수치가 아니다.
약을 먹는다고 해서 약한 사람이 아니고
병원에 간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 아니다.
치료는 회복의 시작이고 용기의 증거다.
우울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주는 것,
그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조용히 기댈 수 있는 어깨 하나가 더 중요하다.
“힘내”보다는 “힘들지?”
“왜 그랬어?”보다는 “괜찮아, 네가 그렇게 느낄 수 있어.”
말보다 마음의 자세가 위로가 된다.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성실한 사람, 웃음 많은 사람, 강해 보이는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이 병은 특별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느 지점에서 누구에게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우울증은 가까이 있는 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우울은 병이기도 하지만 삶이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의 신호일 수 있다.
신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건너갈 때
진짜 회복의 길 위에 설 수 있다.
은파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