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3. 스물 홍대에서의 2년
반쯤 등 떠밀려 오게 된 대학 그리고 서울. 지금도 사람이 붐비는 곳, 소음이 많은 곳을 꺼려하지만, 홍대로 이사 오기 전 십 대의 저는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싫어하는 것을 넘어 두려워했습니다. 어릴 적 비만이었던 저를 창피하게 여겼던 엄마의 태도에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다들 나를 쳐다보고 평가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지방 도시의 특징인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당시 제가 자라온 울산 시내에서는 유달리 서로의 외모나 패션을 평가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갑작스레 서울 그중에서도 홍대에서 살게 된 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붐비는 곳에서 지내야 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홍대, 그리고 제 걱정이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대에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 그곳에서는 어떤 누구도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홍대에서는 모두가 서로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습니다. 놀랍고도 좋았습니다 이 홍대의 분위기가. 마냥 들뜨고 신비로웠던 그날 저녁, 저는 이곳을 오래도록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첫 숙소는 홍대의 구 기숙사였습니다. 후문의 가파른 비탈길 옆에 위치한 낡고 오래된 붉은 벽돌의 건물. 기숙사는 저렴했지만 좁은 공간에 2층 침대 4개가 자리하고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상당히 후진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갓 상경한 새내기에게는 훌륭한 보금자리였습니다. 3월은 새로운 만남으로 가득했습니다. 서른 명 남짓의 동기들. 비슷한 수의 선배들. 같은 문과 대학에 속한 다른 과의 사람들. 같은 방을 쓰는 기숙사생들. 누군가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의 친구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고 알아갔습니다. 물론 그런 만남에는 늘 술이 있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진 술자리. 자정 통금이 있는 기숙사는 들어가지 않기 일 수였고 거진 매일을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과대 집에서 보냈습니다. 주중 낮 공강 시간에는 당구장에 가기 바빴고, 점심을 먹다 괜히 기분이 동할 때면 낮술을 하고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주말에는 누가 주선한 건지 모를 미팅에 신입생 MT, 단과대 MT, 다른 대학에 간 고향 친구들과의 만남이 이어졌습니다. 정말 열심히, 후회 없이 놀았습니다. 동시에 첫 한 달은 제 전공이 얼마나 쓸데없는 시간 낭비인지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영어라도 배워볼까 해서 온 것이었는데, 영어영문학과는 '영어'가 주가 아니라 '영문학'이 주였습니다. 전공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삶과 그의 작품을 수능 국어 공부하듯 분석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 다른 전공 수업에서는 영어를 말할 때 구강에서 어떤 원리로 소리가 나는지를 가르쳤고 곧장 여기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학과 수업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휴학을 하려 학사지원팀에 가보았지만 1학년은 군 휴학을 제외하고는 휴학이 안 된다고 하여 그냥 그대로 뒀습니다. 자퇴를 하자니 당장 기숙사를 나와 다른 갈 곳이 없었고 어차피 학비는 아버지 회사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학비가 헛되지 않게 했습니다. 각종 흥미로워 보이는 다른 학과 수업 혹은 교양 수업에 참관하여 혹여 그중 내 길이 있지는 않은지 알아보았습니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막연한 관심에 홍대 4대 중앙 동아리 중 하나라는 스트릿 댄스 동아리에 들어가 춤도 배우고 교내 및 교외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동아리에서 눈이 맞은 누나와 첫 연애도 했습니다. 모든 게 처음이었던 풋풋한 연애. 한편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일본식 카페 겸 레스토랑에서 주 6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도 벌었습니다. 하루빨리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히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또 제 손으로 직접 일을 하며 돈을 벌어 보고도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그렇게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이곳저곳 여행을 떠나보며 내 꿈이 무엇인지 너무 늦지 않게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여기저기를 누비며 쉼 없이 생각들을 적어 나갔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하고 어떤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고 싶어 하는가. 스스로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해가며 점점 더 나를 알아갔습니다.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구나. 나는 좋은 사람들과 바쁜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예술과는 거리가 있구나. 나는 마음 터놓고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자전거를 타고 분해 조립하는 걸 좋아하는구나. 나는 가사가 와닿는 노래를 좋아하는구나... 즐겁고 알찬 시간들이었습니다. 정말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고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나보며 동시에 끊임없이 미래에 무얼 하고 싶은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제 생활을 아니꼽게 보던 사람들도 몇몇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그때의 영문과 4학년 과대 형과 부과대 누나. 그 둘은 정말 모범적인 대학생 생활을 해가며 제게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뭐가 되려 그러냐. 수업 좀 나오고 정신 차려라. 그런 그들에게 저는 졸업 후에 어떤 일이 하고 싶냐고, 꿈이 뭐냐고 물었고 그들은 그저 연봉이 높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영문학과에는 왜 왔냐고 물었더니 그저 성적에 맞춰 왔다고 했습니다. 한심했습니다 정말. 이렇게 껍데기뿐인 인생을 살고 있다니. 안타까웠습니다. 지독하게 어리석은 이 사람들이.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있게끔 한 우리 사회가.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던 중 100가지 다양한 직업을 소개한다는 책을 보고 문득 여기 소개된 직업들 중 가장 끌리는 직업들을 직접 체험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껏 알아온 나를 책에 소개된 여러 직업들에 대입해 보며 과연 내가 이 직업을 좋아할지 혹은 내 적성에 잘 맞을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책장을 넘겨가며 이렇다 싶은 직업들을 체크하고 또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이 가는 직업들을 고르고 고르다 보니 세 직업이 남았습니다: 조향사, 직업 군인으로서의 특전사, 소방관. 이 중 직업 군인은 조만간 가게 될 군대에서 간접 체험할 수 있으니 해결되었고 소방관은 직접 경험해 보기가 마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책, 다큐멘터리, 인터뷰 등 간접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아 잠시 미뤄두었습니다. 조향사, 이 독특하고도 신기한 직업을 체험해 볼 일이 없을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고 강남역 근처 갈리마드 스튜디오라는 곳에서 민간 교육 코스를 통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하여 곧장 기초반에 등록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던 기초 조향 수업은 정말 즐겁고 흥미로웠습니다. 매일 수업 날만 기다렸고 늘 두어 시간 일찍 가서 향을 외우는 연습을 하고 항상 밤늦게 선생님들과 함께 스튜디오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생각해 보니 어릴 적부터 냄새에 예민했고 향을 좋아했습니다. 향에 대해 알아가고 향을 가지고 놀 때면 온전히 향에만 집중해 세상에 나와 이 향기만 있는 듯했습니다. 어떤 근심도 걱정도 사라지고 시간이 가는 줄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6개월간 기초 수업을 받으며 마음에 확신이 섰습니다. 향을 대하는 일을 하자. 모든 것을 잊게 할 정도로 몰입하게끔 하고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라니, 이 길로 가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겠다. 죽이 되었든 밥이 되었든 지금 마음이 이끄는 이 길로 진로를 잡자. 대신 향을 대하는 일을 하되 구체적인 직업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조향사가 되는 방법, 매일 하는 일, 연봉, 안정성 등에 대해 조사를 해보니 이 일은 나와 맞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먼저 조향사는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예술가, 즉 화가와 같았습니다. 다양한 물감을 가지고 자신 만의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 자신만의 감각, 색, 예술성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허나 저는 이런 예술적인 일에는 영 흥미도 재능도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향의 과학적인 부분에 끌렸습니다. 기초 조향 수업에서 여러 향의 화학적 특성과 어떻게 이를 추출하는지 혹은 합성 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성되는지도 배울 수 있었는데, 이런 부분이 저는 몹시 흥미로웠습니다. 화학적 시각으로 보는 향. 화가가 있다면 필히 화가가 사용하는 물감을 만드는 이도 있을 터, 그리하여 저는 향료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향 화학자에 대해 알아보았고 이 일이야 말로 내게 맞는 그리고 내가 진정 가고자 하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향 화학자 또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화학자이기에 화학을 전공하고 최소 석사 학위를 취득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학과로 전과를 해 학사를 마치고 후에 석사로 향 화학을 할 수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처음부터 뭔가 아다리가 맞지 않았습니다. 먼저 홍익대학교에는 화학과가 없었습니다. 취업에 도움이 안 되는 쓸모없는 자연과학이라고 없앤 것인지 취업에 유리하다고 하는 화학공학과만이 있었습니다. 나아가 전과를 하려 학사지원팀에 문의해 보니 전과는 현재 전공의 1학년 성적을 바탕으로 전과 면접을 보고 2학년을 전과하고자 하는 과로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영어영문학을 1년간 배우며 좋은 성적을 받고 화학공학과로 2학년 전과를 한다고 한들 그 화학공학과 2학년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으니까요. 더구나 저는 이 소중한 시간을 단순히 성적만을 위해 의미 없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1년간 영어영문학을 배운다는 건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묘수를 뒀습니다. 영문과 신분으로 화공과 1학년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라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신분만 영문과지 화공과 1학년 수업을 다 따라갈 테니 2학년에 전과를 하고 화공과 2학년 수업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전혀 지장이 없을 터였습니다. 제 신박한 생각에 학사지원팀에 근무하시던 분은 처음 들어보는 얘기지만 이론상 가능은 하다고 말씀하시며 다른 단과대 전공수업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해당 과의 교수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화공과 1학년 전공수업을 하시는 교수님들을 한 분 한 분 직접 찾아가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수업을 들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나가지 않아 올 F였던 기존의 1학년 성적을 삭제하고 다시 1학년으로써 영문과 소속으로 화공과 1학년 수업들을 따라갔습니다.
과학고를 준비한답시고 중학교 때 고등학교 수학 과학을 다 때긴 했었지만 워낙 시간이 지난 터라 화공과 전공수업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기숙사에서 나와 1평 남짓 창문 없는 고시원에서 살며 하루 5시간 고시원에서는 잠만 자고 수업을 듣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밥은 늘 한솥, 밥버거 혹은 편의점으로 때웠습니다. 정말 사람이 이렇게까지 공부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전공을 A 혹은 A+로 마쳤고 전체 학점 평균 4.2로 1학년을 마쳤습니다. 영문과 학생이 이런 점수를 받는데 니들은 뭐냐며 화공과 1학년 학생들에게 핀잔 아닌 핀잔을 주던 교수님들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허나 이 1년을 거치며 저는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 화학공학과는 화학+공학이 아니었습니다. 멍청하게도 저는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그저 화학공학과라고 하면 화학과 공학을 둘 다 배우는 곳이겠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화학과가 무언가를 개발하는 화학자가 되는 화학을 배우는 곳이라면, 화학공학과는 화학공학, 즉 화학 공정을 설계하는 일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화학공학을 통해 화학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화학 공장을 설계하는 화학공학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두 번째로 한국 대학은 치명적인 사회적 구조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화공과 1학년에는 약 50여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물어보니 그 누구도 화학공학이 좋아서 화학공학을 배우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들 그저 취업이 잘 된다고 하니, 가능한 높은 곳으로 지원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 화학 성적이 좀 잘 나와서 라는 그런 이유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수업시간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습니다. 억지로 끌려 나와 아무런 이유도 열정도 없이 시간만 때우는 학생들. 이게 무슨 짓거리인가 싶었습니다. 아니 왜 다들 원치 않는 것에 이리도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걸까. 학생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교수들도 문제였습니다. 하나같이 그저 수업자료를 줄줄 읽기만 할 뿐, 그 어떤 교수도 학생들의 이해와 비판적 사고를 키워주려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National Geographic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만도 못한 수업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점의 분배였습니다. 교양 학점의 비중이 높아도 너무 높았습니다. 대학은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전문 지식을 쌓고 배우려 오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교양 학점 비중이 거진 반이었습니다. 거기다 이런 교양 학점을 반드시 다양한 분야의 수업으로 채워야만 했습니다. 화공과 학생으로 화학공학을 배워도 모자랄 판에 스페인 문화의 이해를 배우고 있자니 정말 현타가 시게 왔습니다. 홍익대만의 문제일까 해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의 대학에 간 친구들에게 연락해 보니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건 사회적 구조적 문제였습니다. 본인의 흥미와 관심 열정을 무시하고 취업 좋은 직장 남에게 뽐낼 수 있는 위치만을 따지는 사회적 문제와 미국 대학 시스템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국 대학의 구조적 문제가 합쳐져 만들어낸 답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 머리가 띵 할 정도로 현타가 왔지만 그걸 고민하고 있을 새가 없었습니다. 종강을 하고 일주일 뒤 군입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잡하고 답답한 심경으로 전과 시험을 치고 일주일 뒤, 2013년 12월 26일,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다음 날 저는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