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오들오들 떨리는 화장실에서 따땃한 물로 몸을 헹구다 보면 어릴 적 엄마가 챙겨주고 아빠가 들어주던 목욕 바구니 생각이 납니다. 한숨 쉬어가듯 느긋한 시장의 일요일 아침. 아빠랑 둘이 동네 공중목욕탕으로 향할 때면 늘 묘하게 설렜습니다.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학원 문을 열 때의 느낌과 흡사 비슷했습니다. 꼭 게임 속 던전 입구와 같은 어두운 입구, 그 입구를 지키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듯 입장료를 받는 목욕탕 주인 아주머니, 행운을 빈다는 눈빛으로 건네주는 수건과 신발장 열쇠, 콩콩 뛰는 가슴을 애써 숨기며 3층으로 올라가 '남탕'이라 적힌 문을 열어 재끼면 풍겨오는 특유의 목욕탕 내음. 목욕탕을 간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지금은 다행히(?) 아니지만, 여기저기 군살이 붙은 내 말랑한 몸과 고래를 잡지 않은 내 천연 소중이가 부끄러워 뜨신 물이 좋으면서도 사실 목욕탕 가는 걸 꺼려했습니다. 탕에 들어가 있으면 세상 나른하고 좋았지만 탕 밖에 있을 때 괜히 혼자 의식되서는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좋은 기억'이라 생각되는 걸 보면, 저는 그 뜨끈한 탕을 참 좋아했나 봅니다.
인턴시절 영국 리즈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는 속된 말로 목욕에 미친놈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전기, 물, 가스를 포함한 모든 공과금이 비싼 월세에 포함되어 있었던지라 다행히 매일 녀석이 하루 두 시간씩 목욕을 해도 통장은 괜찮았습니다. 집에서는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목욕을 해 본 적도 없고 또 성인이 되고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목욕탕에 가지 않았던 저도 덕분에 참된 목욕의 세계에 빠져들었습니다.
뜨끈한 물에 담긴 몸, 활짝 열린 큰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시계탑과 그리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싸구려 유학생 숙소에서 저는 일주일에 두어 번 두 시간가량의 천국을 맛봤습니다. 그 이후로 찬 바람이 불 때면 자꾸 뜨신 물 생각이 납니다. 언젠가 인생이 무료해질 시점이 오면 꼭 뒷마당에 다카마쓰 붓쇼잔 온천마냥 나무틀로 탕을 짜고 매일 아침 찬 공기에 따신 물로 몸을 녺이고 싶습니다. 을매나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