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4 봄비 엘레지
숲 속의 요정 얼레지
봄비에 고개 숙인
보랏빛 얼레지 사진이
처연하게 곱습니다
보랏빛 얼레지 꽃은
빛에 예민하게 반응을 한다죠
오늘처럼 비가 오고 흐린 날에는
꽃잎이 새초롬하니 오므라들지만
햇빛이 따갑게 눈부신 한낮에는
꽃잎이 뒤로 동그랗게 말린답니다
미인의 얼굴처럼 갸름한 잎에
자줏빛이나 진한 갈색 얼룩무늬가 있어
얼레지라고 부르는데요
가재무릇이라고도 부른답니다
곱디고운 보랏빛 얼레지는
'숲 속의 요정'이라는
사랑스러운 꽃말을 가졌어요
가녀린 꽃대가 고개를 수그리고
땅을 보며 수줍게 피어나다가
여섯 장의 꽂이파리가 춤이라도 추는 듯
날개를 활짝 펼치며 뒤로 말려 올라가는데
치마폭이 바람에 날리는 모습 같아서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도 가졌답니다
비에 젖은 보랏빛 얼레지는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보다는
비련의 여인이 더 어울립니다
방울방울 눈물방울 매달고 있는
보랏빛 얼레지 꽃이 애잔한 목소리로
봄날의 엘레지를 노래하는 것 같아요
비가(悲歌)라고도 하는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한
악곡이나 가곡을 말합니다
서정시의 일종으로
애도와 비탄의 감정을 표현한 시를
엘레지라고 부르기도 하죠
봄비에 고개 숙인
보랏빛 엘레지 꽃을 보며
고독과 방랑의 시인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제2비가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저들 아름다운 이들
아 누가 그들을 잡아둘 수 있을까
끊임없이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우리의 것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도 없이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위해
봄비에 젖은 보랏빛 얼레지처럼
다소곳이 마음을 모으고
잠시 귀를 기울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