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89 사랑과 우정 사이의 푸른빛
영화 '원 데이'
잔잔히 슬픈 느낌이
예뻐서 더 아픈 느낌으로 옵니다
청춘의 푸른빛이 시린 만큼
긴 세월 동안 엇갈리는 두 사람이 안타깝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찾은 행복이
너무 짧아서 여운이 깊은 영화 '원 데이'는
2006년 7월 15일에서 시작합니다
수영장 파란 물속에서 인어처럼 수영하던
엠마(앤 해서웨이)가 수영을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전거에는 깜빡이가 없으니
좌회전 표시로 왼팔을 촤라락 펼치는군요
발레리나가 날개를 펼치듯 우아합니다
물론 앤 해서웨이니까요
영화 속 원 데이는 7월 15일이랍니다
영국에서 성 스위딘 데이라고 불리는데요
이날 비가 오면 40일을 계속 비가 내리고
맑음이면 40일 내리 맑음이라는 전설이 있고
엠마와 덱스터(짐 스터게스)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우아하게 달리는
2006년 7월 15일로부터
1988년 7월 15일로 시간이 되돌려지고
푸른빛으로 물드는 새벽빛 속에서
대학 졸업파티를 끝내고 나오는
엠마와 덱스터의 긴 세월 엇갈리며 이어진
우정과 사랑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엠마는 덱스터를 진심 사랑했으나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덱스터는 자신에게 힘들고 아쉽고 필요할 때만 엠마를 찾는 영양가 없는 남사친이죠
두 사람은 대학 졸업식날 처음 만나는데
사실은 덱스터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엠마는 덱스터에게 이미 마음이 있었거든요
어쨌든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작가를 꿈꾸는 엠마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면서도
지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덱스터는 여전히 가벼운 삶을 살아갑니다
1988년부터 20년 동안 7월 15일
반복되는 같은 날짜의 하루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보여주는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운명처럼 비켜가고
어긋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세월이 흐르듯이 주인공들의 모습도 변하고
생각과 마음도 달라지기는 해요
내일이 어떻게 되든
오늘은 함께 있다는 엠마에게
덱스터가 주고 싶은 선물은 자신감이죠
'내가 너에게 평생 줄 수 있는 선물이 하나라면
뭘 주고 싶은지 알아? 바로 자신감'
사랑과 우정 사이의 먼길을 돌아
두 사람은 2004년 드디어 결혼합니다
두 사람은 연애와 결혼까지 한달음에
정신 차린 덱스터는 조그만 카페를 열고
이혼한 전처 실비가 낳은 딸
재스민과 주말에 만나며
성실한 생활자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엠마와 늦었지만 행복한 걸음을 내디뎌요
안타깝게도 행복의 시간은 너무 짧죠
2006년 7월 15일
원하던 임신이 되지 않아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엠마를 다독이며
덱스터는 저녁에 영화 데이트를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순간
엠마는 떠나게 되죠
수영을 마친 후
아침에 화낸 것에 대해
덱스터에게 사과 메시지를 남기고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달리다가
왼쪽 팔로 우아하게 좌회전을 알리고
골목을 빠져나가자마자 큰 트럭에 부딪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는~
엠마의 마지막 메시지를 듣고
빗방울 스치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웃는 덱스터와 한쪽 신발이 벗겨진 채
하늘을 보고 누운 엠마의 모습이 겹치다가
덱스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립니다
엠마 없이 맞이하는 2007년 7월 15일
술에 취한 채 한바탕 싸움질을 하고
엉망이 된 모습으로 괴로워하는
덱스터에게 아버지가 말해요
'매년 7월 15일마다 이럴 거냐?
내가 함께 울어줄 수는 없잖아
하나 조언하자면
앞으로 열심히 살면 돼
엠마가 옆에 있는 것처럼'
잠옷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
처량 맞게 아침 수프를 먹으며
'그럴 수 있을까' 묻는 덱스터에게
아버지가 건네는 대답은
'살다 보면 살아져
난 이미 십 년이나 그렇게 해 왔단다
드라마나 보자 9시야'
다시 말끔한 얼굴로 카페 일을 하는
덱스터를 보러 엠마가 사귀던 전 남자 친구
안경남 이안(라프 스펠)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던지는 말 또한 7월 15일입니다
'난 오늘이 싫어 7월 15일이잖아'
성 스위딘의 날이라고 대꾸하는
덱스터에게 건네는 이안의 위로가
무심한 듯 따스합니다
'엠마는 네 곁에 있을 때 행복해했어
너랑 있을 때 엠마가 환히 빛이 났거든
내 결에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
그래서 더 화가 났었어
엠마가 널 사람으로 만들었지
그 대신 넌 엠마를 행복하게 해 줬어
엄청 행복해했어'
이안의 말에 웃으며 덱스터는
엠마와의 첫 만남을 회상합니다
'난 엠마 몰리야 오늘 뭐할까 산책이라도 할까'
함께 나지막한 연초록 언덕을 걷는 두 사람
'어제는 어제 오늘은 오늘'이라고'
웃으며 엠마는 덧붙여요
'나중 나중에 마주치면 그땐 아는 척하자'
첫 만남부터 묘하게 꼬이고 어긋났거든요
동그란 안경을 쓴 엠마와
처음 만나 함께 갔던 추억의 언덕
연초록 풀들이 바람에 일렁이는 낮은 언덕에
덱스터는 딸 재스민과 함께 갑니다
엠마와 처음 갈 때처럼 불편한 신발 때문에
딸 재스민에게 느리다고 타박을 받죠
'엠마 이모와 함께 왔었느냐'고
재스민이 묻자 고개 끄덕이며
'한 번 왔었다'고 대답하고는
엠마 이모 보고 싶냐고 또 묻자
'응 절친이니까'
절친이라는 대답에 애틋함이 일렁입니다
'지금은 네가 아빠의 절친이야'
덱스터의 말에 딸 재스민이 웃어요
'내 절친은 아무래도 엄마야'
새침데기처럼 대답하고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딸 재스민의 사랑스러움이
엠마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아요
처음 만난 엠마와 덱스터가
부질없는 하루를 보내고 헤어지다가
엠마에게서 전화번호를 받고
걸어가는 엠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덱스터의 순수 미소가 아련합니다
그리움 찰랑이는
푸른빛 엔딩이 아름답게 슬퍼서
그냥 웃고 싶은 영화 '원 데이'
앤 해서웨이의 해바라기 미소와 함께
씁쓸한 여운이 길게 남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