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72 예쁘고 사랑스럽고 애틋한

영화 '작은 아씨들' 2019

by eunring

조랑조랑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묶음 같은

메그와 조와 베스와 에이미 자매들의

꿈과 사랑과 추억과 슬픔이 아롱진

'작은 아씨들'을 읽던 어린 시간들은

기억 속 저편으로 이미 흘러갔어요


소녀시절이 끝났다는 게 슬프다는

영화 속 조(시얼샤 로넌)의 대사가

저무는 빛과도 같은

쓸쓸함과 적막감으로 다가서지만

그 시간들 속에서 끌어안았던

풋풋한 설렘과 아련한 행복감은

지금도 마음의 다락방 창문 가에

곱게 마른 풀꽃들이 잔잔히 내뿜는

애틋한 그리움의 향기로 남아 있어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볼 때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추억의 별빛들은

이제 더 이상 눈부시지 않지만

고요하고 잔잔해서

더욱 귀하고 정겹습니다


그 기억들 속에

안쓰러움으로 남은 베스는

보랏빛 제비꽃 한 송이 같아요

조용하고 사랑스러운 베스를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 끝자락이 아릿해집니다


'힘겨운 삶을 살았기에

즐거운 이야기를 쓴다'고 말한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 '작은 아씨들'을

그레타 거윅 감독이 연출한 2019 버전은

시얼사 로넌이 조를 연기하고

메그 역의 엠마 왓슨에

까칠한 대고모님이 대배우 메릴 스트립이라니

보고 싶은 마음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데

또다시 착한 베스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사르르 아프오기 시작합니다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키우는 조(시얼사 로넌)는

베스(엘리자 스캔런)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자매들의 소녀시절을 회상합니다

현재와 과거의 일들이 퀼트 조각처럼

슬픔과 기쁨과 좌절과 행복의 무늬가 되어

곱고 사랑스럽게 이어지는데요


7년 전 조와 로리(티모시 샬라메)는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죠

언니 메그(엠마 왓슨)와 함께 파티에 간 조는

불에 태워먹은 드레스 때문에

꼼짝 않고 얌전히 있다가 옆방으로 가는데

파티가 서먹해 혼자 있는 로리를 만나요

드보르자크의 현악 4중주 '아메리칸' 3악장이

신나고 경쾌하게 울려퍼질

건물 밖에서 조와 로리가 장난스럽게

막춤을 추는 장면이 웃음을 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세상아'

외치는 조는 선머슴처럼 자유롭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음식과 담요 등을 들고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풍경 속을 걸어가는

천사 같은 네 자매의 모습을 내다보던 로리는

숲 속 연못가 우편함 열쇠를 건네며

자매들 클럽의 회원이 되었으나

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귀족 도련님으로 꾸물대며 살고 있죠

로리바라기 에이미(플로렌스 퓨)의

간절한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일하지 않는 희고 게으른 손에

조가 어릴 적에 장난으로 준 반지를 낀 채

조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따분함을 견뎌가며 부자인 대고모님에게

책을 읽어드리고 용돈과 함께 잔소리를 듣다가

자신의 앞길은 스스로 개척한다고

당차게 반항하며 맞짱 뜨던 철부지 조가

아픈 베스를 보살피며 회상하는

지난날의 장면들이 애틋합니다


연극 공연에 데려가지 않은

조를 화나게 하려고

조가 아끼는 원고를 태워버린

질투쟁이 에이미를 평생 미워하겠다는 조에게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으면 안 된다는

엄마(로라 던)의 말씀이 옳아요

로리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가는 조를 뒤쫓아갔다가 얼음에 빠진 에이미를 보며

후회하는 조에게 엄마는 말씀하시죠

분노 때문에 장점이 묻히지 않게

평생 애써야 한다고~


딸이 치던 피아노가 비어 있으니

누군가 치러 왔으면 좋겠다는

이웃 저택의 로렌스 할아버지가

수줍음 많고 조용한 베스의 피아노 연주를

문 밖 계단에 앉아 듣는 모습도 애잔합니다

베스가 연주하는 슈만의 곡들이 해맑아요

'너를 보면 딸이 생각나'

로렌스 할아버지에게 피아노를 선물 받고

수줍게 기뻐하는 베스의 발그레한 뺨도

슈만의 피아노곡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워요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북부군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당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엄마를 위해

긴 머리카락을 팔아 기차표값을 마련한 조가

머리카락 때문에 우는 모습도 눈에 선해요

치렁한 긴 머리의 조도 예쁘지만

짧은 머리의 조도 상큼 발랄합니다


존과 결혼하겠다는 언니 메그에게

배우가 꿈이었으니 나랑 도망치자고 하자

'내 꿈이 네 꿈과 다르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메그가 말하죠

자신의 꿈은 사랑으로 이룬 가정과 가족이라며

결혼해서 떠나는 게 아니고

언젠가 네 차례도 올 거라는 메그의 말에

자유롭게 독신으로 살며

인생의 배를 저어 가겠다는 조가

'소녀 시절이 끝나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때

덩달아 먹먹해지는 건 왜일까요


메그는 결혼하고

에이미는 대고모님과 유럽으로 떠난 후

로리의 프러포즈를 받은 조는

고맙고 자랑스럽지만

감정을 사랑으로 바꿀 수 없고

결혼보다 자유가 좋다며 거절하고

작가의 꿈을 안고 뉴욕으로 날아갔던 거죠


죽음을 앞둔 베스가

바닷가에서 조에게 말해요

'죽음은 썰물 같은 거야

한번 빠지면 막을 수 없어'

'내가 막을 거야 전에도 막았잖아'

가난한 이웃을 돕다가 성홍열에 걸린

어린 베스를 엄마 대신 보살피던 조는

그때처럼 간절히 베스를 구하고 싶은 거죠

그러나 신의 뜻은 막을 수 없다고

베스는 자신을 위해 글을 쓰라며

조를 다독이고 자매들 곁을 떠납니다


집에 있으면 너무 외로울 테니

뉴욕으로 가서 다시 글을 쓰라는 엄마에게

로리가 다시 청혼한다면 거절하지 않겠다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게 좋다며 조는 울먹입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엄마는 말씀하시는데

숲 속 우편함에 로리에게 쓴 편지를 넣는

조의 외롭고 지친 모습이 안타까워요


안타까운 베스의 소식을 듣고

유럽에서 로리와 에이미가 돌아옵니다

평생 로리를 사랑했으나

늘 조보다 못한 존재였다며

조에게 거절당한 로리와 결혼할 수 없다던

에이미는 더 이상 철부지가 아니죠


'베스는 아프고 조는 가망 없고

메그는 가난한 가정교사 존에게 빠졌으니

네가 희망이야'

대고모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예술가의 꿈 대신 사교계의 장식품이 되어

부자인 프레드와 결혼하려던 마음을 접고

원작보다 한결 성숙해진 에이미는

어릴 적부터 사랑하며 따르던

로리와 결혼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자매들끼리 화내기에 인생은 너무 짧잖아'

로리에게 보낸 우편함의 편지를 찢어

강물에 날려 보내는 조는

베스가 없으니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쓸쓸한 모습의 로렌스 할아버지에게

베스의 절반만큼도 착하지 않지만

친구가 되어드리겠다고 하죠


흔들림을 딛고 다시 일어선 조는

베스를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자매들이 살아온 이야기

'작은 아씨들'을 써 내려가는

조의 모습이 진지하고 아름다워요


대고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저택에

학교를 만들겠다는 조에게

뉴욕의 하숙집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프리드리히(루이 가렐)가 찾아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아

떠나려 한다는 프리드리히가

베스의 피아노에 앉아 베스를 추모하며

연주하는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이

베스를 잃은 슬픔을 위로하며 달래줍니다

로리의 마차를 타고 프리드리히를 쫓아가는

조의 모습에는 사랑이 넘쳐흘러요


베스를 위해 쓴 소설을 출판하게 된 자리에서

왜 옆집 남자를 거절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막내와 결혼했다고 조는 웃어요

주인공이 독신이면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하자

결혼은 소설에서도 경제적인 문제라는

조의 말에 그것이 로맨스라는

출판업자의 팽팽한 기싸움도 재미나고

돈 때문에 주인공을 결혼까지 시켰으니

보상이 필요하다며 인세 협상을 하는

조의 당돌함이 매력 넘칩니다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조의 학교

그리고 빨간 표지의 '작은 아씨들'을

가슴에 끌어안는 조의 미소가

당당하고 아름다워요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열린 결말이

오히려 마음에 드는 '작은 아씨들' 덕분에

잠시 소녀시대로 돌아간 시간 여행이

애틋하고 행복했으나

제비꽃 같은 베스를 생각하면

보랏빛 슬픔의 향기가 스며들어요


베스의 말처럼

신의 뜻이니 어쩌겠어요

만남은 헤어짐과 손잡고 오고

기쁨의 바로 옆자리에는 슬픔이

행복의 뒷자리에는 아픔이 함께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인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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