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275 주홍빛 추억이 머무르는
능소화 피어난 길
울 동네 고운 주홍빛 꽃송이들이
부드럽게 휘늘어진 능소화벽 꽃길이 있어요
햇살 닮은 주홍으로 눈부시게 피어나고
흐린 날은 잿빛 하늘 아래 붉은 마음 더욱 곱고
빗방울 머무르는 자리마다 그리움이 젖어드는
참 아름다운 길이랍니다
저어기 능소화 꽃길이 있다고
엄마가 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자랑하실 때
그런가 보다 꽃길이 있나 보다~했었죠
엄마는 그 고운 길을 늘 혼자 걸으셨습니다
딸이 여럿이라도 사는 게 바쁘고
저마다 고단한 삶을 걷느라
꽃길 돌아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딸들이랑 나란히 꽃길 걸으며
소녀처럼 발그레 웃고 싶으셨을
엄마의 마음도 미처 살필 줄 모르는
이기적인 철부지들이었으니까요
어쩌다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달랑달랑 커피 한 잔 사러 가면서
호젓하게 나 혼자 그 길을 걸으며
꽃보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빠져들고
일부러 짬을 낸 하루 친구들이랑
꽃보다 수다가 좋던 시절
엄마에게도 친구들이 곁에 있으려니
나 편하자고 마음을 놓았었죠
엄마가 아프고 힘이 없어
휘청 걸음을 걸으실 즈음에야
엄마랑 능소화 꽃길을 걸었습니다
처음에는 느린 걸음으로 나란히
그러다 엄마의 팔짱을 끼고 천천히
이제는 차를 타고 그 길을 스쳐 지나갑니다
여름이 서서히 기울듯이
주홍빛 능소화도 저물고 있어요
엄마의 시간처럼 묵묵히 이울어갑니다
저무는 능소화 꽃벽의 사진을
부질없이 찍어봅니다
꽃이 저물고 시들어 다 떨어지고
꽃이 피어난 흔적마저 사라진 후에도
찬란한 슬픔이 주홍으로 빛나는
울 엄마의 꽃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