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533 겨울을 외치다
세상의 중심에서
도봉산 아래 친구가 사는 동네에는
지금 함박눈이 내린답니다
해님이 기웃기웃 슬며시 나오다 말다
잠시 헷갈리는 모양이라는데요
울 동네는 눈가루 폴폴 흩날리다 말고
해님이 비죽 고개 내밀까 말까
고민하는 하늘이 묵직한 잿빛입니다
이런 날은 카페라떼가 어울린다 싶어
집 앞 카페에서 사 온 라떼 한 잔을 앞에 두고
키가 그리 크지 않으나 커피에 진심이라는
키다리 커피 청년이 만든
커피잔 속 눈사람 사진을 봅니다
눈사람이라기보다는 하얀 장군 눈사람 같아서
눈사람 장군님~이라고 불러보다가
혼자 중얼거립니다
귀엽고 듬직한 눈사람 장군님이
커피잔의 중심에서
겨울을 외치다~
그렇습니다
12월의 한복판 커피잔의 중심에는
사랑스러운 눈사람 장군님이 있고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어요
물론 내 세상의 중심일 뿐
온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비록 좁다란 나만의 세상이라도
오붓한 내 세상의 나는 가여운 만큼
예쁘고 귀하고 사랑스러워요
매우 부실하고 무척이나 부족해서
한 그루 연약한 나무를 닮았으나
그래도 반듯하게 버티고 서서
햇살을 반기고 바람을 피하지 않으며
빗줄기와 눈송이와도 친구하고
내 안에 깃드는 새소리에
가만 귀를 기울일 줄 아니까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일본 영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한참 오래전에 본 영화라
내용은 선명하지 않으나
그 절빅함만은 손에 잡힐 듯 느껴져서
기억은 사라져도 느낌이나 감정은
고스란히 살아남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간절하게 사랑을 외치는 영화도 있고
내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부여안고 사는
연약한 내가 있듯이 커피잔의 중심에서
겨울을 외치는 하얀 눈사람 장군님도 있으니
다채롭고 흥미롭고 재미난 세상인 거죠
우유 거품 퐁퐁 금방 사라지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참 늠름하고 당당하고
사랑스러운 눈사람 장군님과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겨울을 외치다
겨울 한복판에서
나를 외치다~
나지막이 외치듯 중얼거리는 순간
바보에게는 바보만의 복이 있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