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534 그래도 웃는다
어설픈 하트가 고마워서
오늘은 쌉싸름한 아메리카노 대신
포근하고 고소한 카페라떼를 마십니다
날이 너무 차가워지니 우유 거품에라도
따뜻하게 스며들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차가운 날씨 탓인지 생각도 쪼그라들고
얼마 남지 않은 여유도 슬며시 사라지고
생각과 마음이 손톱만큼 줄어들다가
막다른 골목이라는 생각이 듵 때가 있어요
막다르니 더 나아갈 수 없어 막막하죠
높다란 탑에 홀로 갇힌
라푼젤이라는 생각이 듵 때도 있어요
내려다보면 아득하고 까마득할 뿐
내려갈 수 있는 계단 하나 보이지 않고
날개가 없어 날아갈 수는 더욱 없으니
훨훨 나는 새들이 부러울 뿐인데요
휘리릭 날아가는 새가 이렇게 말하는 듯~
니들이 날갯짓의 절박함을 알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음의 창문까지 닫힌 건 아니라서
가만 눈을 감으면 창문 밖을 흘러가는
구름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는 거죠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구름이 뭔 노래냐고 물으신다면
네 네~구름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지만
그러나 들을 수는 있다고 대답할래요
눈에 보이는 건 보이는 만큼
귀에 담을 수도 있으니까요
차디찬 겨울이라 그런지
내 친구 아메리카노의 개운함까지도
어쩜 그리 무심하고 무정하고 쌀쌀맞은지
일편단심 아메리카노에서 문득 벗어나
고소한 카페라떼로 갈아탈 때면
테이크아웃 컵 뚜껑을 열며
잠시 설레기도 합니다
뭉그르르 우유 거품이
제멋대로 뭉그러져 있으면
뭐 그러려니 받아들이다가도
어쩌다 어설픈 하트라도 그려져 있으면
그나마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
피식 웃어요
아주 가끔씩 예쁘고 사랑스러운
하트를 만나면 기분까지 우쭐합니다
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닌데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덥석 안겨드는 뜬금 행복인 거죠
우유 거품 겹겹이 보드랍고 풍요로운
제대로 된 하트는 어쩌다 만나는 행운이고
어설픈 하트는 쪼매난 행복이라서 웃게 됩니다
하트 따위 상관없이 뭉게구름 두둥실 거품도
그 나름 포근하게 웃을 수 있으니
내 친구 아메리카노에게는 미안하지만
추위를 핑계 삼아 겨울 한정 라떼 놀이에
당분간 빠져들 것 같아요
카페라떼 한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우유 거품이 만들어내는 하트가
인생을 닮은 것 같기도 해요
누구나 거품 퐁퐁 제대로 된 하트를
멋지게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지만
인생의 그 무엇 하나도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요
부푼 기대 안고 올랐으나
나를 기다리는 건 포근 구름도 아니고
내기 생각했던 풍경이 아니더라도
묵묵히 오른 오르막길 끝에는
잘 견디고 버티었다는
안도감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편할 것 같아도
내리막길 역시 결코 쉽지 않지만
또 견디고 버티며 내려오면
크게 숨 한번 내쉬며
잠시 쉴 만한 순간이 있으니
그 또한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해야죠
바로 눈앞에 또다시
가파른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길이란 걸어봐야 아는 거고
인생의 길이란 멈추어 돌아볼 때
비로소 걸어온 길들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거라는 생각에
고개 끄덕이며 웃습니다
한 줄기의 길도 녹록지 않고
단 한 걸음도 만만하지 않으나
중간에 주저앉지 않고 이만큼 왔으니
온 만큼은 더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래도 웃어봅니다
아무리 높은 탑이라도
멀고 먼 저 하늘보다 높지 않으니
내려오는 방법이 분명 있을 테고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갔다가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면
미련 없이 되돌아 나오면 되는 거라고
뽀그르르 어설프게 웃고 있는
카페라떼 한 잔 앞에 두고
그냥 웃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