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시간 624 한 그루 나무는
한 편의 시
한 그루 나무는
한 편의 시가 됩니다
나무는 나무라서 떠나지 못하고
늘 같은 제자리에 머무르며
여행을 꿈꾸는 눈빛으로
한 편의 시를 씁니다
봄날엔 봄날의 시를 씁니다
연둣빛 바탕에 분홍 글씨로
새 잎을 틔우고 봄꽃을 피우며
설렘으로 망울지는
애틋한 한 편의 시를 씁니다
나무 그늘 짙어지는 여름엔
파란 하늘에 흰 돛단배 띄우며
가만 눈 감고 파도 소리 그리는
어린 소년의 마음으로
열정으로 눈부신
여름날의 시를 씁니다
가을이 오면 바람결에 온몸 부대끼며
하나의 잎사귀마다 그리운 이름 새기고
지난 추억을 곰곰 되새기듯
붉은빛 노란빛으로 물들어가며
나의 빛을 벗고 비움을 배우는
가을의 시를 씁니다
겨울이 깊어지면
눈꽃을 하얀 꽃송이 삼고
송이송이 눈송이를 열매 삼아
시리고 찬 바람이야 불든 말든
잔가지 제멋대로 나풀대며
고즈넉한 겨울의 시를 씁니다
새순이 돋아 오르고
녹음이 깊어지고
꽃빛이 짙어지다 떨어지고
꽃보다 고운 열매가 맺히고
단풍잎으로 물들어 나부끼는
순간과 시간과 바뀌는 계절
그리고 흐르는 세월의 시를 씁니다
그러다 훌훌
바닥에 흩어져도
여전히 고운
한 편의 시가 됩니다
같은 나무에서 나고 자라
사이좋게 살랑대며 나부끼다가
바람에 흐트러져 바람 비행기 타고
이리저리 맘껏 날아오르고
힘차게 구르는 순간까지도
아름답고 처연한
한 편의 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