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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Dec 11. 2023

초록의 시간 644 비가 오는 날이면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

비가 오는 날이면 문득

다시 꺼내보고 싶은 영화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답게

싱그러운 초록 빗소리에 젖어드는

감성적인 그림이 참 예쁩니다


빗소리가 쓸쓸함의 깊이만큼

차갑고 고즈넉하고 정겨워서

언어의 정원이라기보다

빗줄기 한 올마다 애정과 진심이 담긴

녹색 비의 정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빗소리와 함께

섬세하고 정감 있게 흐르는

피아노곡이 방울방울 빗방울처럼

사랑스럽게 마음에 젖어들어

눈과 귀가 맑아집니다


스토리와는 상관없이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비가 오는 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빗방울 톡톡 떨어지기 시작하면

빗소리와 함께 떠오를 것 같아요


영화 '언어의 정원'의 주인공은

일찍 철이 든 애어른 타카오와

걷는 법을 잊어버린 어른 유키노지만

배경이면서 동시에 또 하나의 주인공은

빗소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만든 구두를 신고 다니며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에 가는 대신

공원에서 구두를 디자인하며

미래의 꿈을 키워나가는

열다섯 살 소년 타카오의 성장에도

후드득 쏟아지는 빗줄기가 필요하고

현실에 지쳐 걷는 것이 힘겨워

맥주와 초콜릿에 길들여진

스물일곱 살 어른아이 유키노에게도

빗방울 톡톡 튕기며 앞을 향해

걸어 나가는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스물일곱 살인 지금의  나는

열다섯 살 무렵의 나보다 나아진 게 없다

나는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녀 유키노와

그녀의 나이도 직업도 이름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녀에게 끌리는 소년 타카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공원에서 만나게 된 날도

초여름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고

함께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먹고

빗소리 들으며 커피를 마시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행복한 순간이라고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느낀다고

마음을 털어놓는 날도

창가에 빗줄기가 스치는 날입니다


장마가 끝나고 여름이 가고

겉옷이 하나씩 두터워질 때마다

그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지

생각하는 소년은

더 많이 철든 모습입니다


엔딩곡이 흐를 때

저녁놀이다가 깊은 어둠 내리고

오다 그치고 게 갠 날에 이어

송이송이 하얀 눈송이

추억의 눈꽃으로 피어나는

시간과 날씨와 계절의 변화가

잔잔히 흐르며 아련함으로 물드는

소년의 첫사랑처럼 아름다워요


소년은 공원으로 가서

유키노와 늘 만나던 자리에

그녀를 위해 만든 구두를 내려놓으며

걷는 연습을 하고 있던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백합니다 

언젠가 좀 더 멀리 갈 수  있게 되면

만나러 가겠다~  

소년의 독백이 여운으로 남습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을 향해

그리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

저마다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덜 외로울 거리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공원에서 유키노와 함께 나눠 먹던

소년의 알뜰 도시락이 생각날 것 같아요

두 사람이 행복하게 만들어 먹던

오므라이스도 생각나지만

도시락과 오므리이스는 생략하고

빗방울 스치는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 마셔야겠어요


비 오는 날

창가에 스치는 빗소리 들으며

우두커니 혼자 마시는 커피는

좀 청승맞긴 해도

향기로운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이

그윽하고 운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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