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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Mar 18. 2024

초록의 시간 724 상냥한 봄

망울망울 산수유꽃

바로 앞서 가시는 할머니의

종종걸음을 따라잡기 민망하여

앞지르지 않으려고 잠시 멈추었다가

대여섯 걸음 떨어져 걷습니다


두어 권 책을  손으로 받쳐 들고

바삐 움직이시는 모습이

새봄처럼 풋풋하고 싱그러워 보여서

할머니의 봄은 연두색이라고

혼자 생각해 봅니다


할머니의 바쁜 걸음은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문득 멈추고

두어 궨 책을 가슴에 끌어안

계시는 모습이 애틋합니다


학교는 수업 중이라 조용한데

빼꼼 얼린 교문 사이로

할머니가 살랑살랑 봄바람인 듯

손을 흔들기 시작하시더니

무어라 혼잣말까지 중얼거리시네요


아닙니다 혼잣말이 아니라

손자 녀석에게 책을 전해주려 오셨군요

운동장을 쌩하니 가로질러

덩치가 할머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고등학생이 마구 뛰어옵니다


할머니 할머니~

덩치는 이미 청년인데

할머니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리광이 묻어 있어요

오냐오냐 할머니의 대답에는

사랑이 쫀득합니다


손주 녀석은 할머니에게서

책을 받아 들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람처럼 달아나는데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시는

할머니의 옆얼굴에는 사랑의 미소가

손주 녀석의 모습이 다 사라질 때까지

떠나지 않고 햇살처럼 머물렀어요


돌아오는 길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노랑 산수유를 만났는데요

산수유 꽃망울 사이로 보이는

맑은 봄날의 하늘빛이

할머니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노랑 산수유꽃을

망울망울 품고 있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주 녀석의 푸르른 꿈이

팝콘처럼 재미나게 터지기를

함께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그 할머니를 아느냐고 물으신다면

모릅니다 그 손주 녀석도

물론 알지 못합니다

봄이니까요

지나가는 누구에게라도

웃음 건네고픈 상냥한 봄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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