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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ring Apr 24. 2024

초록의 시간 745 큰 결심

그리고 큰 걸음

일 년에 많아야 서너 번

동네 미용실에 가는데요

이런저런 이유로

몇 번 아닌 미용실 나들이에도

내 나름 큰 결심이 필요합니다


미용실에 다녀오면

머리는 짧아지고 단정해져

마음까 단순 깔끔 개운한데

몸은 지쳐 몸살을 앓듯

며칠 동안  늘어지니까요


지금이 딱 웨이브도 좋고

머리 길이도 적당하다는

미용실 언니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냥 짧게 잘라달라고 부탁했어요

짧을수록 손질도 간단하

손가락으로 쓱쓱 빗어서

후르르 넘기기 좋으니까요


바로 옆자리에는

사랑스러운 꼬맹이 소녀가

의자 위에 디딤판을 놓고  앉아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를 자르고 있는데

그 소녀 역시 나처럼

큰 결심을 하고 왔다는군요


긴 머리 소녀와 헤어질 결심

그리하여 단발머리 소녀가 될

대단히 크나큰 결심을 하고

미용실 의자에 앉았답니다


귀 아래로 바짝 잘라서

가지런히 잘린 머리카락의 길이가

30센티 정도는 되게 해달라고

소녀의 엄마가 옆에서

부탁하며 덧붙이기를

머리카락을 기부하려면

정도 길이가 되어야 한다는군요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기부하려는

큰 결심을 하고 온 소녀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찬찬히 바라봅니다

참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어서

칭찬의 한마디 건네고 싶으나

참습니다 기특하고 착한 일은

소란한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니까요


어린 암환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가발을 만드는데 필요한 머리카락을

몇 년 동안 기르고 잘라서

선뜻 기부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요


짧게 자른 머리를 찰랑이며

활짝 웃는 꼬맹이소녀의 눈과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순간

와락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 없이 누군가를 돕고

생색 따위 내지 않고 나누는

그런 마음이 내게도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돕기 위해 돕고

나누기 위해 나누며

속으로 으쓱대지 않았는지

찬찬히 반성모드~


줄 때는 내게도 귀한 것을 선뜻

나눌 때도 내게 필요한 것을

남아서 주는 게 아니고

내게 필요하지 않아서

나누는 것이 아님을

거울 속 단발머리 소녀를 보며

새삼 깨닫습니다


주면서 요란 떨고

주었다고 소란 떨고

나눈다고 유난 떨다가

나누었다고 생색까지 내면

선뜻 준 것도 아니고

기꺼이 나눈 것도 아니니까요


진심의 발자국은

소리가 없는 것임을

단발머리 소녀 덕분에 다시 깨달으며

이렇게 쓰디쓴 반성문을 쓰고 있는

나란 사람 참 바보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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