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판타지 048 아빠하고 나하고

영영이의 소곤거림

by eunring

아빠 잠깐 실례할게요

영영이의 핑크 의자를

아빠의 하얀 의자 곁에

나란히 놓을게요


너무 가까이

바짝 붙이지는 않을게요

한 뼘쯤 사이를 두고

영영이가 잠시

아빠 곁에 앉아도 될까요?


아빠의 시간

고요한 혼자만의 시간

고즈넉한 아빠만의 시간을

영영이가 방해하는 건 아니겠죠?


아빠와 나란히 앉아

해 지는 풍경을 바라볼게요

오늘은 유난히 저녁 하늘이 예뻐서

저무는 하늘빛 위로 아롱지는

붉은 저녁놀도 고울 것 같아요


영롱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을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하며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한대요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가장 귀하고 좋은 사람이래요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니

영영이가 그동안

아빠에게 소홀하지 않았나 싶어요

다예랑 머리 맞대고 숙제하는 사이

윤슬이랑 까르르 깔깔 웃음 날리는 사이

지안이랑 나란히 앉아 책 읽는 사이

아빠 혼자 하얀 의자에 앉아

외롭고 심심하셨을 것 같아요


미안해요 아빠

이제부터는 영영이가

아빠랑 많이 놀아 드릴게요

숙제도 아빠 곁에서

책 읽는 것도 아빠 곁에서

수수께끼나 끝말잇기 놀이도

아빠랑 함께 할게요


영영이 어릴 적엔

아빠가 노래를 불러주고

재미난 책도 읽어주셨듯이

이제는 영영이가 노래도 부르고

어려운 책도 읽어 드릴게요


이제부터는 영영이가

아빠 간식도 챙겨 드릴게요

영영이가 좋아하는 거 말고

아빠가 좋아하시는 걸로 챙길게요


사랑은 그런 거래요

내 마음보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래요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거래요


진짜 중요한 건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진짜 사랑이래요


사랑이란 아침 햇살처럼

마냥 설레고 눈부신 것이 아니라

저무는 풍경이나 지는 꽃처럼

여리고 눈물겹게 쓸쓸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대요


사랑하면 할수록 외롭고

사랑이 깊을수록

쓸쓸함이 깊다는 걸 받아들여야

비로소 철든 사랑인 거라고

영롱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붙잡는 것도 사랑이고

놓아주는 것도 사랑이래요

영영이를 꼭 붙잡고 놓지 않은

아빠의 사랑도 사랑이고

영영이가 아플까 봐 살며시 놓아준

엄마의 사랑도 사랑이래요


그럼 아빠

사랑은 술래잡기 같은 걸까요

붙잡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는~

아니면 숨바꼭질 같은 걸까요


머리카락 보일라

꽁꽁 숨기도 하다가

술래가 되어 찾아다니기도 하는

그런 게 사랑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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