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원을 항해하다

메세타의 고독

by 은섬

순례 12일 13.5㎞
출발 : 까르데뉴엘라 리오삐꼬 Cardenuela Riopico
도착 : 부르고스 Burgos

까르데뉴엘라 리오삐꼬 알베르게는 근처 바 주인이 관리를 하고 있는 터라 그는 건물 열쇠를 통째로 우리에게 주었다. 샤워 중에 정전이 되어 동네 사람들과 카드 게임 중이던 바 주인을 불러와야 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른 순례자 없이 아네트와 단 둘이 조용하고 느긋한 밤이었다.

이른 아침 알베르게 열쇠를 바 주인에게 전달하지 못해 난감해하다가, 바 우편함에 열쇠를 넣고 그 사실을 그림으로 남긴 채 길을 나선다. 알베르게를 나서자마자 오르막길 위로 다시 비가 내렸고 문을 연 바를 찾지 못한 우리는 벤치에 앉아 비를 맞으며 비상식량을 털어 비스킷과 젤리로 아침을 때웠다. 길 위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먹는 비스킷은... 믿거나 말거나 생각보다 꽤 괜찮다.

주택단지, 공항과 산업지대를 지나 부르고스다. 순례를 시작한 지 2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 당도한 부르고스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만큼 거대한 대도시로 우리는 최대한 일찍 그곳에 도착해 호텔을 잡고 빨래방과 은행 ATM, 약국 등 필요한 편의들을 해결하며 중간 점검을 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대리석으로 쌓은 벽이 성채처럼 웅장한 부르고스 대학에서 세요를 받고, 교내 카페테리아에서 토르띠야와 카페 콘 레체로 간단히 요기를 했다. 부르고스 대성당 광장에 있는 돈 누뇨 Don Nuno 식당 메뉴에 한국라면이 있다고 하니 한식이 그립다면 찾아봐도 좋을 듯하다. 부르고스 대성당을 둘러보는 중 비아나에서 헤어졌던 카트린을 만났다. 그녀는 비아나 이후 컨디션 난조로 버스를 타고 부르고스까지 점프했다고 한다. 말을 듣지 않는 허벅지 근육 때문에 다리를 들어 올리지 못해 발을 질질 끌면서도 부르고스까지 걸어서 온 것이 기적 같다.



순례 13일 32.5㎞
출발 : 부르고스 Burgos
도착 : 온따나스 Hontanas

부르고스를 벗어난 따르다호스 마을 입구에는 옛 로마 성터에 건설된 순례자 병원이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로 남아 있다. 오르니요스를 지난 후에는 마켓이나 바가 없어서 길 끝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비를 맞으며 땅콩과 초코빵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 마을을 끝으로 오르막과 끝없는 밀밭이 이어지는데 언덕 위 왼쪽 밀밭 한가운데 도자기를 굽는 가마같이 생긴 독특한 알베르게가 있다. 산 볼 San Bol 알베르게는 규모가 매우 작고 현대적인 시설이 없지만 기꺼이 편의와 맞바꿀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계속 비가 내려 온따나스까지 온통 찰진 진흙 길이다. 신발에 붙은 흙덩이는 점점 더 커지고 한없이 무겁다. 늪에 빠지는 느낌이랄까? 무릎 관절이 빠져나가는 고통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언덕 아래로 갑자기 보이지도 않던 온따나스가 훅하고 나타난다. 고원이 계속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온따나스는 마을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언덕에 가려져 있다. 보이지 않는 목표는 얼마나 모호하고 지난한가...



순례 14일 29.5㎞
출발 : 온따나스 Hontanas
도착 : 보아디야 델 까미노 Boadilla del Camino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데 아네트가 집에 문제가 생겨 당장 독일로 돌아가야 한다며 짐을 싼다. 둘째 아들 담임이 갑작스레 학부모 면담을 요청했는데, 거절하거나 미룰 수 없다고 했다. 계속 길을 걷고 있으면 며칠 후 돌아오겠다며 레온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건네고 아네트는 떠났다.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산 안톤 수도원을 지난다. 15세기에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수도원 입구에 거대한 아치가 있는데 지금도 그 아래로 자동차가 다니고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타우 십자가 목걸이를 팔며 세요를 찍어주던 할아버지가 아치 아래에 계셨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아네트를 생각하며 타우 십자가를 한 개 집어 들었다. 점심때가 지나 언덕 꼭대기를 가로지르는 마을 바에서 토르띠야와 카페 콘 레체에 꽁꽁 언 몸을 녹이는데 아네트가 나타났다. "아네트! 왜 다시 왔어? 비행기 표가 없어? 어찌 된 일이야?" 속사포로 질문들을 쏟아내자 아네트가 웃는다. 남편이 대신 담임을 만나러 학교에 가기로 했고, 지나가는 차를 잡아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타우 십자가를 보며 네 생각을 했어! 다시 우리를 만나게 해 달라고!" 아치에서 고른 타우 십자가를 아네트에게 건넸다.


급경사 구간을 지나 보아디야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에 머물렀는데 온수 사용량이 정해져 있어서 그 물을 다 쓰고 나면 다시 물이 데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사용해야 한다. 비바람에 옷이 다 젖어 추위에 덜덜 떨다가 샤워까지 찬물로 하자니 머리가 띵하다. 입맛이 없어 저녁식사는 바에서 인스턴트 피자로 대충 허기를 달랬다.



순례 15일 25.5㎞
출발 : 보아디야 델 까미노 Boadilla del Camino
도착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Carrion de los Condes

밤 새 마르지도 않은 축축한 옷을 입고 출발한다. 비가 계속되는 날인데도 스페인의 태양은 어찌나 강렬한지 안경 자리만 빼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려 판다가 되었다. 프로미스따 수로를 지나자마자 만난 첫 바에 들어갔다. 스페인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하얀색 빵 배달차를 보고 가게에 들어갔는데 이른 아침이라 준비된 음식이 하나도 없다. "많이 배고파?" 난처한 표정의 주인아저씨가 스페인 말로 묻는다. 배고프냐는 말이 스페인어로 뭔지 모르지만 아저씨의 질문은 딱 그 말이었고, 아네트와 나는 동시에 독일어와 한국어로 "네, 배고파요!"를 외쳤다. 나는 독일어의 '배고파요'를 모르고 아네트 또한 한국어의 '배고파요'를 모르지만 서로의 대답이 '배고파요'였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아저씨도 안다. 아저씨는 크게 웃으시면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뭐든지 만들어 볼게!" 하신다. 이 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스페인어였지만 다 알아 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휘파람을 불며 아저씨가 달걀을 거품기로 쳐서 팬에 굽는다. 달걀물이 익어가는 동안 향긋한 커피까지 내려주셨다. 방금 만든 따듯하고 부들부들한 달걀과 커피는 아저씨가 흥얼거리는 콧노래와 휘파람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아침이 되었다.

통증이 온몸을 타고 돌아다닌다. 오늘은 오른쪽 정강이다.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알베르게까지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마을 초입에 있는 호스텔에 묵었다. 감사하게도 빨래 서비스가 무료였고, 밤 새 난방이 뜨끈뜨끈해서 며칠 추위에 떨었던 몸을 충분히 녹일 수 있을 것 같다. 저녁으로 염장해서 말린 대구요리인 바깔라우를 시켰는데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진 아네트는 샐러드만 겨우 삼킨다. 들쑥날쑥 하루에도 몇 번씩 급변하는 컨디션이다.



순례 16일 26.7㎞
출발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Carrion de los Condes
도착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를 벗어나는 길 끝에는 산 소일로 San Zolio 수도원이 있는데 건물이 크고 웅장하며, 외벽 조각이 매우 아름답다. 현재는 3성급 호텔로 이 건물 한쪽에 자리한 까미노 데 산티아고 연구 및 자료보관센터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오픈 시간이 10:30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까리온을 벗어나 숲, 밀밭, 아스팔트 도로가 계속 이어진다. 레디고스 언덕 위 성당에는 야고보 사도 세 성상(순례자 야고보, 사제 야고보, 전사 야고보)이 있다.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 마을 알베르게는 다인실이 아닌 2인실을 사용할 수 있어서 보다 쾌적하고 안락했다.



순례 17일 30.1㎞
출발 :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도착 : 엘 부르고 라네로 El Burgo Ranero

알베르게 바에서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스페인 삼총사에게 인사를 한 후 길을 나섰다. 스페인 삼총사는 순례길 처음부터 일행은 아니었지만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행이 된 이들이다. 오며 가며 늘 이들을 마주치게 되어 함께 식사도 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사하군을 통과하면서 프랑스길과 옛 로마 도로가 있는데 옛 로마 도로는 최근까지 늑대가 출몰했다는 숲을 통과하기 때문에 조금 멀리 돌아가도 프랑스길을 택했다. 하지만 갈림길에서 헷갈려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걸었다.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현지인이 우리가 있는 곳까지 돌아와서 길을 가르쳐주신다. 이런 현지인들이 있어 까미노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완벽한 '미션 임파서블'이다.

반지의 제왕 영화에 나올 법한 고대의 문과 입석을 지나 엘 부르고 라네로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Hostel El Peregrino에서 묵었는데 호스텔 맞은편에 알베르게가 있지만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곳이라 호스텔을 택했다. 영어 메뉴판도 없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식당에서 우리가 주문을 못하고 있으니 꼬끼오~ 음메~ 꿀꿀~ 소리와 모션을 곁들여 메뉴를 설명해 주신다. 놀랍고도 정확한 설명에 박수와 엄지 척 쌍따봉을 드렸다.



순례 18일 37.4㎞
출발 : 엘 부르고 라네로 El Burgo Ranero
도착 : 레온 Leon

아침 길을 나서자마자 스페인 삼총사를 다시 만났다. 이들은 어제 추운 알베르게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몇 개의 마을과 몇 개의 다리를 건너 장이 선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운 파프리카가 멜론만큼 크다. 비상식량으로 대왕 파프리카를 샀는데 어찌나 큰지 배낭이 묵직하다.

레온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로 레온 왕국의 수도였다. 로마네스크와 고딕건축을 대표하는 성당과 가우디가 설계한 보티네스 저택 등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잘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레온에 들어서서 까르바할라스 Carbajalas 베네딕드 수녀원 알베르게에 짐을 풀었다. 이틀 전에 이곳에 도착한 마태오가 컨디션 회복차 레온에 계속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네트는 마태오를 만나러 가고, 나는 알베르게에서 머물렀다. 알베르게는 2층에 있었는데 높은 돌계단을 기어올라가다시피 하는 모습에 수녀님들이 걱정하신다. 약국에서 탄력밴드와 바르는 근육로션, 드레싱 밴드 등 다리를 움직이고 걷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죄다 고르니 36유로가 넘었다.

숙소에서 정말 끔찍한 코골이 순례자를 만나 모두들 잠을 자지 못했다. 코 고는 소리에 웃음이 터져 밤새도록 깔깔거렸다. 네덜란드에서 온 루비와 타미라를 이곳에서 처음 만났는데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음을 참지 못해 마냥 웃었다. 이후로도 우리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터져서 순례길 내내 '레온의 밤'을 모르는 주변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180Km 엿새 동안 끝없이 펼쳐진 고원의 밀밭...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메세타의 광활함을 경험한다. 여름에는 그늘 없는 뜨거운 열기를, 겨울에는 비바람 피할 곳 없는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하기에 많은 순례자들이 메세타를 건너뛰고 레온까지 기차나 버스로 점프를 한다.

급경사 구간에서 힘이 들 때마다 오르막만 아니라면 또는 내리막만 아니라면, 자갈길만 아니라면 정말 잘 걸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막상 오르막도 내리막도 험한 자갈길도 아닌 평지의 길이 속도 내기가 어렵고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 고갈이 심했다.

인생길도 이와 같지 않을까? 롤러코스터 같이 모든 것을 내리꽂는 시련의 너울 따위 없는 인생이라면, 희로애락 없이 그저 평탄한 삶이라면 우리는 마냥 유유자적 평온무사할 수 있을까?

망망대해 같은 대평원에서 자꾸만 발걸음이 무겁게 처질 때 나의 속도에 맞춰 따라오는 작은 새가 있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닿을 듯 말 듯 평행선을 그리던 새는 내게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걸까? '울뜨레야 Ultreya, 울뜨레야 Ultreya' 메세타의 이야기를 전했던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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