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잠이 깨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읽다가 다시 잠들기 위해 집어 들었던 『소년이 온다』는 오히려 나를 철저히 깨어있게 만들었다. 5.18의 참상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미뤄왔던 이 책을, 이번 달은 '극복하는 사람'으로 살아보기로 결심한 김에 용기 내어 펼쳤다. 그리고 시작한 순간부터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렀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명작이 가진 힘이다. 독자를 완전히 몰입시키고,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힘.
눈물과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평소에 눈물이 없는 편인데, 이 책을 읽으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가장 가슴 아팠던 장면은 동호 어머니가 먼저 떠난 동호를 그리워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이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유가족이 겪는 상실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눈물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정의롭고 용감했던 이들이 학살과 고문의 대상이 되어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동안, 가해자들은 포상을 받고 호의호식했다는 현실 앞에서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특히 모든 비극의 원흉인 전두환이 90살까지 잘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내 정의감을 크게 흔들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 눈물과 분노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이었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끄는 시작점이었다. 불의 앞에서 분노하고, 타인의 아픔에 눈물 흘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말하는 '인간다움'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질문은 왜 답이 아닌 변화를 향하는가?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드는" 이 소설은, 다양한 인물의 시선으로 5.18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이 질문들이 무언가의 답을 찾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해설을 읽으며 깨달았다. 질문은 답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낳고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사유는 확장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한다. 결국 질문의 진정한 목적은 '사유의 변화'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겨울서점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언어화된 경험을 소설로 읽는 것 자체가 사유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그것을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질문들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다시 우리를 더 깊은 사유로 이끈다. 『소년이 온다』는 바로 이런 순환을 만들어낸다. 5.18이라는 참혹한 경험을 섬세한 언어로 표현하고, 그것이 우리 안에 질문을 일으키며, 그 질문들이 우리를 더 깊은 사유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변화한다.
질문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소설은 처음에 "어떻게 인간적인 삶을 껴안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고민은 결국 더 견디기 어렵고 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순서나 위계가 아닌, 우리의 사유가 깊어지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싸움
소설 속 인물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이 안타까웠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깊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되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들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인 생존 본능과 싸웠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는 구절이 보여주듯, 동호는 죽음이 두려운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싸워 끝내 도청을 지키기로 했다. '죽고 싶지 않다', '고통받고 싶지 않다'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본능과 맞서 싸운 것이다.
이런 싸움은 살아남은 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은숙은 동호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은숙의 고백은, 그녀가 어떻게 동호의 죽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선주 또한 5.18 당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며 오랜 시간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 그저 외면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들을 기꺼이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움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람들"이다. 권력은 '인간이란 죄책감 없는 폭력 그 자체이거나 폭력 앞에 굴복하는 냄새나는 몸뚱이일 뿐'이라고 규정하려 했다. 하지만 이들은 가장 강력한 생존 본능조차 초월하며, 그것이 인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증명해 보였다.
나의 변화
과거의 나는 책을 단순히 정보 습득과 자기계발의 도구로만 여겼다. 소설은 '읽어도 남는 게 없다'는 생각에 외면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빠른 결과보다 과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나는 소설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질문한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의 의미는 그 과정 자체에 있다.
『소년이 온다』는 이러한 깨달음을 더욱 선명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들과 함께 평생에 걸쳐 사유를 확장해나가야 한다. 빠른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질문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우리의 사유는 자연스럽게 깊어지고 넓어진다.
이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원래 타인의 고통을 전이받는 것이 불필요한 감정낭비라 여기며 회피하기 바빴다. 그런 회피가 오히려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더 괴롭게 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깨달았다.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분노로 시작되는 이 감정들이 사실은 인간의 이기심과 싸움으로써 인간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타인의 아픔에 눈물 흘리고, 불의에 분노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과정이 자아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며 나는 과거의 타인들과 강렬한 연대감을 경험했다. 내가 아닌 존재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을 넘어서는 것이었는데, 물리학의 양자 얽힘 현상이 보여주듯 우주의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뇌가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라는 특별한 신경세포를 통해 타인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있다. 타인의 행동이나 감정을 관찰할 때도 실제 경험할 때와 같은 뇌의 영역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도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이제 나는 이 연대의 범위를 더 넓히고 싶다. 김상욱 교수는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면 그제야 우리는 인종과 국가, 종교의 경계를 넘어 하나의 인류로 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보다 더 큰 범주와 만나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정체성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계 문명을 상상하게 하는 SF처럼, 다양한 장르의 소설이 나의 세계를 더욱 확장시켜줄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른 세계를 만남으로써 내 세계를 넓히기 위함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소년이 온다』의 진정한 힘이다. "어떻게 인간적인 삶을 껴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우리를 끊임없는 사유의 여정으로 이끈다. 빠른 답을 주지 않는 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이제 나는 안다. 이 질문들과 함께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우리가 찾던 답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