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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이끄는대로

by 내면여행자 은쇼

『불편한 편의점』 작가님이 집 앞 도서관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대기 17번이었다.
사실상 참석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북토크 하루 전날 저녁,
예상치 못한 문자가 도착했다.

참석이 확정되었습니다.

설렘과 동시에,
“아… 책이 없다!”는 당황이 밀려왔다.

사인을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지금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배송은 늦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갑작스럽게 책을 찾아 동네를 누비게 되었다.


첫 번째 서점의 문은 닫혀 있었다.
잠깐 허탈했지만 운동할 겸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 읽던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문장이 떠올랐다.

조금 느리게, 한 걸음씩, 오로지 몸의 움직임과 땅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며 걷다 보면,자꾸만 멀리 몽상 속으로 떠나버리는 제 의식도 몸과 하나가 되는 듯했습니다. p.109

책은 머리가 아니라, 걸으며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거구나.


두 번째로 방문한 서점에서는 『불편한 편의점』이 품절되고 없었다. 아쉽게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카운터에 놓인 책 한 권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 생각을 다 믿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낯설지 않았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으며 마음에 깊이 새겼던 그 메시지가, 이번엔 제목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p.8


계속 허탕을 치고 있지만, 책의 문장들이 나를 어디론가 이끄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불편한 편의점』을 어떻게 구하지? 싸인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다 중고서점에 버스를 타고 가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종종걸음쳤지만, 그는 눈 앞에서 나를 지나쳤다... 어쩔 수 없이 직행이 아닌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버스 안에서 작은 실랑이를 목격했다.
아이 둘과 함께 탄 엄마가,
“아이들 요금을 제 카드로 함께 찍게 해달라”고 말했고,
기사님은 반복해서 “규정상 본인 카드만 가능하다”고 답했다.

누가 옳은지는 한순간에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깊은 깨달음이 남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보다 어떻게 말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그 확신이, 상대에게는 방어와 불편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내가 읽었던 책들이, 이 짧은 장면을 더 깊게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 버스를 놓친 이유가, 혹시 이 장면을 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온라인으로 새 책만 사던 나에게, 중고서점은 거의 신세계였다. 책 사이를 천천히 걷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돌아본 과학책 코너 옆에, 정말 아무 맥락도 없는 그곳에 『불편한 편의점 2』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정말로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게다가 그 책에는 프린트 사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단풍과 함께 어느덧 가을 always 편의점의 모든 계절에 함께 해 주신 독자여러분, 정말 고마워요!

오늘의 이 우연과 감정을 기억하고 싶어서, 나는 사인본을 선택했다. 조금 더 비쌌지만, 충분히 값어치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문득 『빵 굽는 타자기』가 보고 싶어졌다. 서울을 여행하며 방문한 『타인 나 자신』 북카페에서 책등의 제목만 보고 골랐던 책. 평생을 작가로 살며 세계를 유랑했던 저자의 모습이 현재의 나와 겹쳐져 푹 빠져서 읽었던 책. 알고보니 유명한 인용구를 남겼던 책. 잊고 있던 기억들과 우연히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한다.『빵 굽는 타자기』p.6

이 유명한 인용구가 새겨진 북커버가 있는 버전과, 없는 버전은 4천원 가량 차이가 났지만 나는 전자를 택했다. 자꾸 보고 싶어야 읽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나는 한 권의 시집을 마주쳤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제목은 들어봤지만, 책을 펼쳐본 건 처음이었다. 그동안 시는 나에게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는 장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집은 달랐다. 한 문장도 거를 타선이 없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살아 있는 것들을 보라.
사랑하라.
놓지 마라.
- 더글러스 던


당신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하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자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어떤 꿈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알고 싶다.
-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초대>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 잘랄루딘 루미 <여인숙>

그렇게 나는, 시에 입문했다. 한 줄 한 줄을 꼭꼭 씹어먹고 싶은, 그런 문장들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오늘 둘러본 중고서점은 다음 주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될 카페 근처에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불안을, 책들이 말없이 감싸주는 듯했다. 하루의 끝에 나를 기다려줄 서점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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