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에서 내가 몇 번째야?"
"날 정말 사랑하는 거 맞아?"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를 그동안 연애사에서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애정 표현이 적고 무뚝뚝한 성격인 건 인정한다. 하지만 표현을 꼭 말로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상대가 강요한다면.
데이트폭력(교제폭력)은 최근 5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2023년 기준으로 검거된 가해자 수는 1만 3,939명으로, 2019년 대비 약 41% 증가했습니다. 2024년 1~4월 신고 건수는 2만 5,967건으로, 하루 평균 214건의 범죄가 발생했습니다.
-출처: AI브리핑
이성 간의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대다수가 여성일 것이다. 나 역시 스토킹부터 언어폭력까지 연달아 겪으면서 피해 의식과 함께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괴롭히거나 물리적 혹은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걸까?
박정훈 저서 <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에서는 상대의 친절을 호감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성들이 낯선 사람에게 보이는 친절함을 자신을 향한 호감이라고 단정하는 남성들이 꽤 있다. 미소 좀 지었다고, 눈 마주치며 대화 좀 했다고 저 혼자 '썸' 탄다고 생각하는 남성들 때문에 곤란했던 경험기가 온라인상에 수두룩하다. (20쪽)
남성 본인의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런 형태의 고백은 거절하기 까다로운 상황을 만들어 여성을 궁지로 몰아간다. 남성이 고백해서 얻는 최악의 결과는 거절뿐이지만, 여성은 날벼락같은 고백을 거절할 경우 예상되는 불편과 불이익을 고민해야 한다. 갑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은 함부로 고백해도 괜찮은 상황을 한껏 이용한다. (27쪽)
요즘 유행하는 말로 '고백 공격'을 당해본 경험이 평범한 여성들이라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오래전, 지인 소개로 만난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드럽게 거절했는데, 그 뒤로는 장문 카톡을 수시로 보내거나 만나자고 졸라서 곤란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책임하게 내뱉는 고백은 때로 누군가에게 상처나 폭력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집요하게 따라다니거나 해를 가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명품을 선물로 받아야 상대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여성도 있다. 결혼을 앞둔 커플이 공동 명의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의처증이 심한 모 연예인은 아내를 평생 집안에만 가두고 살면서 폭력을 휘둘러 이혼을 당한 뒤 돌연사했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매 맞는 여성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는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남성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의지와 행위로, 배려, 책임, 존중, 지식의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며, 이는 상호 존중과 헌신을 바탕으로 한 관계의 지속적 성장을 강조한다. 또한, 사랑을 '대상'이 아닌 '태도'로 정의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소유물이 아니라, 아끼고 존중해야 하는 독립된 인격체이다. 하지만 자기 통제 욕구가 강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끊임없이 상대를 구속하거나 집착함으로써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나면 스토킹이나 폭력이 된다. 한없이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무엇보다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프레임 속에 가두는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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