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피로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간간이 친구들과 안부를 주고받곤 했지만,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존재는 드물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카톡 알람이 울렸다.
[미리: 희찬 씨~점심 먹었어요?]
[희찬: 지금 먹고 있어요]
[미리: 전 이제 먹으려고요~맛있게 드세요]
[희찬: 네^^]
그녀는 생각보다 밝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소심하고 주위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나와는 달라서 신기했다. 여자는 적당히 내숭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가끔은 상대방이 솔직하게 다가오길 원할 때도 있었다.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생각보다 컸는지 그녀에게 먼저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쪽에서는 주저함이 별로 없어 보였다.
어느 날 저녁, 귀가하는 길에 그녀한테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모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 가는 길이예요. 마음이 무겁고 이상해요.'
'상심이 크겠네요. 이모부랑 많이 가까웠나 봐요?'
'어릴 적부터 친자식처럼 예뻐해 주셨거든요.'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몇 년 전에 저 세상으로 떠난 이모가 떠올랐다.
사건이 터진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주문을 잘못 받는 바람에 납품이 밀려버렸고, 밤늦게까지 일을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나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날따라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으며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날이 흐려 희뿌연 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문득 말할 때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각난 김에 메시지를 보냈다.
[희찬: 혹시... 주무세요?]
[미리: 아뇨]
[희찬: 전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이에요]
[미리: 퇴근이 늦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희찬: 고마워요^^ 미리 씨는 지금 뭐해요?]
[미리: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있었어요]
[희찬: ^^ 오늘따라 사는 게 고달프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리: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담에 시간 나면 가볍게 한 잔 하실래요?]
[희찬: 좋죠. 잘 자요]
나의 투정을 자연스레 받아주는 그녀가 오래된 친구처럼 든든하고 고마웠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토요일 밤이었다. 우린 바다가 보이는 술집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길 나누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이뤄놓은 건 없고, 하루하루 밥벌이하느라 바쁘네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그나마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 책도 읽고 취미생활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긴 하죠. 좀 더 나은 삶을 원하면서도 막상 현실 앞에선 초라해지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죠."
"맞아요. 늘 핑계 대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죠."
"하하. 역시 미리 씨는 제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요?"
진지한 질문 앞에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음... 주어진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노력하는 것? 말하고 보니 상투적이네요."
"원래 진리는 평범한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할까요?
어색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 사이엔 따뜻함과 편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그녀가 마음에 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엔 말 못 할 고민도 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