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시험 기간이라 정신없이 지냈다던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지쳐 있었다. 우린 바닷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못다 한 얘기를 나누었고, 모래밭을 나란히 걸으며 파도 소리를 들었다.
"여긴 언제 와도 좋네요."
"그죠? 저도 바닷가는 오랜만이라 설레요."
"희찬 씨는 학창 시절에 어땠어요?"
"평범했어요. 가끔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큰 사고는 없었죠."
"기억에 남는 사건은요?"
"음... 중학교 때 가출 사건?"
"정말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학교 가기도 싫고, 부모님 잔소리도 지겨워서 무작정 친구들이랑 도망쳤어요. 용돈 모아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탔는데, 막차를 놓쳐서 근처 여인숙에서 하룻밤 묵었죠."
"그래서요?"
"하필 옆방에 젊은 남녀가 묵었는데, 민망한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예요. 우린 밤새도록 술 마시면서 수다 떨었죠, 뭐."
"재밌는 경험이네요, 후훗."
"미리 씨는 특별한 경험이나 재밌는 일 없었어요?"
이번엔 내가 물었다.
"저도 평범했어요. 같은 학원에 좋아하던 오빠가 있었는데,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어요."
"그랬군요. 첫사랑이었나요?"
"그런 셈이죠."
어느새 우린 바닷가 끝자락에 도착했고, 눈앞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있었다.
"돌아갈까요?"
"음... 여기까지 왔는데 들어가 볼래요?"
"그럴... 까요?"
그녀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다 따라 들어갔다.
우린 방파제 앞에 나란히 앉아서 가만히 파도 소리를 들었다. 파도가 곧 덮칠 것만 같았지만, 파도는 발밑에서 멈추곤 했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하고 싶어요?"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딱히 삶에 미련이 없어서... 그냥 지금처럼 파도 소리 들으며 노래 부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아는 노래 있어요?"
"혹시... '바위섬'이란 노래 알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불렀고, 노래가 끝난 뒤 정적이 찾아왔다.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미리 씨는 절 어떻게 생각해요?"
"네?"
"남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아... 착하고 순수한 사람 같아요. 같이 있으면 편하고요."
"저도 그래요. 얘기도 잘 통하고..."
"그래서요?"
그녀가 똑바로 쳐다보며 묻자, 왠지 쑥스러웠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아니 네 번째 만남이네요. 처음엔 어머니가 재촉해서 할 수 없이 나왔는데, 그동안 미리 씨 덕분에 좋은 추억 많이 만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저도 고마워요."
"앞으로 미리 씨랑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은데... 어때요?"
"지금 저한테 고백하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사실 좀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린 동시에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왔다. 파도는 계속해서 바위에 부딪쳤다가 사라졌고,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도 어느덧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