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고인의 휘파람 4화

by 은수달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과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요즘 다이어트 중이라 한동안 군것질을 못 했는데, 오늘만큼은 나 자신에게 선심 쓰고 싶어졌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희찬아, 지금 어디니?"

"집인데, 왜요?"

여유로운 주말 오후를 방해받아서인지 내 목소리에선 짜증이 묻어났다.

"그럼 얼른 씻고 준비해서 **호텔로 나와라."

어머니의 뜬금없는 요구에 황당했다.

"호텔은 갑자기 왜요?"

"전에 말한 아가씨 소개해주려고 그런다."

"그런 일은 미리..."

"미리 얘기하면 네가 안 나온다고 할 것 같아서 약속부터 잡았다."


순간 머리에서 김이 올라왔지만,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선 안 본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결혼 생각 없다니까요!"

"누가 당장 결혼하라고 했니? 오늘 안 나가면 모자 인연도 끝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전화는 뚝 끊어졌고,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고민 끝에 부랴부랴 갈아입었다. 마음 같아선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싶었지만, 어머니 체면을 생각해서 면바지에 셔츠를 입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선 순간, 낯선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얼마 만에 오는 호텔인가. 몇 달 전에 직장 상사의 권유에 못 이겨 소개팅한 장소였다. 어머니한테 전해받은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창가에 앉아 있던, 단정한 옷차림의 여자가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제가 좀 늦었죠?"

"괜찮아요. 강희찬 씨... 맞죠?"

"네. 미리 씨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스물아홉이고,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하고 있어요."

"그러시군요. 전 디자인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올해 서른둘이고요."

"집이 이 근처라고 하시던데..."


잠시 후,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마자 한 모금 들이켰다. 이런 자리에선 대부분 남자가 대화를 이끌어가기 마련이지만, 연애 경험이 거의 없는 데다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말엔 주로 뭐 하세요?"

다행히 여자 쪽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집에서 쉬거나 운동하러 가요."

"무슨 운동이요?"

"자전거 타거나 산책해요."

"운동 좋아하시는구나."

"좋아하는 건 아니고 건강 관리 차원에서 하고 있어요."

"선은 이번이 처음이세요?"

"네, 미리 씨는요?"

"전 세 번째예요."

선에 관한 경험담부터 시작해서 직장생활의 고충까지 비교적 다양한 얘기가 오갔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태도와 가치관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상대방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집이 어디시죠?"

"택시 타면 돼요."

"그럼 택시 타는 곳까지 배웅해 드릴게요."

매너남으로 보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던 걸까. 택시를 타면서 살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본 순간,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도 내가 그리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벨이 울렸다.

"아가씨랑 아직 같이 있니?"

"좀 전에 헤어졌어요."

"만나보니까 어떻든?"

"뭐... 나쁘진 않던데요. 단정하고 예의도 바르고..."

"그럼 한 번만 더 만나봐라. 요즘에 그만한 아가씨 찾기 힘들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들의 진심을 읽었는지 어머닌 더 이상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문득,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의 얼굴이 오늘 처음 만난 여자와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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