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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Jan 05. 2021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는 게 싫다.

내향주의자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사람하고 어울릴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도 있고,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도 있다. 누가 물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늘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었다. 시간을 공유하고 서로를 물어보지만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공허함은 자주 밀려왔고 달갑지 않은 순간이 꽤 있었다. 한정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감정이 지나치게 소모되고, 나란 사람 자체가 마모되는 기분이었다.



함께 있어도 외로움은 여전히 각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혼자 있는 채 외로움을 감당하며 편해지고 싶었다. 타인을 만나는 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요구하는 일이고 그에 따르는 마땅한 의무와 규율이 있었다.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예의와 관습 가치관들은 간혹 나를 성가시게 만들었다. 폼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혼자 있을 때 귀찮은 일은 없었다. 그래, 나는 혼자 있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의 유럽여행이 나에게 주었던 것은.


한 달 유럽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5년 전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며칠을 어울리거나 짧게 하루 이틀 어울린 인연을 만났다. 두 시간짜리 만남도 있었다. 서로의 목적과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일시적인 만남이 잦았던 시기이다. 존댓말을 하고, 서로에 대해 얕게 묻고, 소회를 나누면서 시간이 지나면 기억나지 않을 대화를 해야만 했다. 전혀 모르는 타인을 위해 호의를 베푸는 사람, 불평만 늘여 놓으며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여행을 주도하는 사람 등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당신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낯선 유럽 땅에서 여행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한국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갑자기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만나고 친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불편하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다른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람을 만나는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이전까지 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외로움을 달래거나 (진정성의 유무와 별개로) 인맥 연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일부였다. 본질적인 이유가 아닌 부수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타인은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타인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서로에게 어쩔 수 없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갈등하고 대립하곤 한다.


타인을 만나야만 알 수 있는 내 모습이 있다.


그러나 타인을 만났을 때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다. 내가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견딜 수 없고, 어떨 때 기뻐하고 화를 내는지 등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된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은 무의식적으로 이상화된 모습일 도 있다. 되고 싶은 것과 실제 자신의 모습은 다르다. 혼자 있을 때는 그 괴리감을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세상을 먼발치로라도 느껴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진짜 자신의 모습도 있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이 모두 드러나는 건 다른 것을 보았을 때다.


인연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피곤한 일이다. 그렇지만..


간혹 끝이 예상되는 사람과 어울릴 때가 있다. 뻔한 만남, 뻔한 시간이 지겨워져서 도망치고 싶다. 인연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사실 만든다고 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도 속이는 게 인연이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속에서 인연이라 생각했던 것을 정리하며 그 사람과 절연한다. 상대방도 모르게 예의 없는 마무리를 짓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신년이니까, 너의 생일이니까 라며 안부를 물어봤다. 왠지 모르는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밀려온다. 반대로 내가 노력하고 굳은 의지로 지속하고 싶었던 인연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있다.


판단은 보류하자. 어리석으니까.


사람은 내가 원하거나 노력한다는 이유만으로 내 옆에 오지 않는다. 인간의 예의를 저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위적으로 인연을 꾸릴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곁에 있을지, 누가 스쳐 지나가는지 누구도 모른다. 판단은 보류하고, 지금 같이 있는 순간에 몰입하는 건 어떨까. 뻔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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