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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는 오늘 이혼 서류를 접수했다.

현진아 너는 뭐 좀 진전 있어? 아니 그대로야.

by 은연주

나나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현진아. 나 방금 막 법원에 가서 드디어 이혼 서류 접수하고 왔어. 한 달의 숙려 기간이 지나고 제발 남편이 무탈하게 약속 장소에 나타나면 좋겠다고.


나나는 직장인 커뮤니티앱 블라인드를 통해서 사귄 온라인 친구다. 블라인드는 회사 이메일로 가입하는 익명 커뮤니티라서 우리는 서로의 회사밖에 모른다.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르는 사람.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어떤 여자.


나나가 결혼 생활 게시판에 너무 힘들다고 쓴 글을 읽게 되었다. 도대체 이런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고 너무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글이었다. 거기에는 내 남편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성격이 너무 비슷했다. 내가 댓글을 달고 우리는 익명으로 채팅을 하기 시작했다.




나나가 쓴 글에 내가 댓글을 달고 우리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외국에 있었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남편이 사는 나라로 설레는 마음을 갖고 출국한 지 며칠 안 됐을 때였다. 남편은 한순간에 동태눈깔이 되어 이혼을 외치고 자기만의 세계로 사라져 버렸다. 시동생 짐을 좀 가져다주라는 시어머니 심부름을 며느리가 어떻게 거절하냐고 울부짖어봤자 남편 귀에 꽂히지 않았다. 피눈물 섞인 내 절규는 그 나라 말이 아니라 어디에도 섞이지 못했다. 내가 뱉어내는 말들은 남편에게 닿지 않았고 언어도 다른 낯선 나라의 허공을 떠돌았다.




네가 심부름을 한 건 곧 자기를 배신한 것이니 네가 유책 배우자라고,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그렇게 강제로 이혼을 통보당했다. 그는 대화를 단절해 버리고 그대로 내 곁을 떠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벌써 1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네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가겠다고 발악하던 그는 갑자기 먼저 가출하는 사람이 유책 배우자로 민법상 소송 이혼의 사유가 되니깐 안 나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대신 나를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을 하며 완벽하게 제거해 버렸다.


시부모님은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1주일 뒤에 들어온다고 하셨다. 엄마 아빠는 집안에 큰 경사를 치르고 매일같이 가족 카톡방에 결혼식날의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며 추억을 되새김질했다. ‘다시 봐도 우리 딸 너무 예쁘네~~‘ 그 메시지를 보고 내게 벌어진 일을 말할 순 없었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혼자서 뭘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집을 나가도 갈 데가 없었다. 모르는 남의 나라의 이방인이었다.


같은 집을 공유했지만 그와 나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절대 섞이지 못했다. 그는 나를 무시했고 배제했다. 나는 그런 그의 대접을 받는 게 힘들어서 되도록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방에만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첫 번째 공황발작이 왔을 즈음이었다. 2시간마다 쪽잠 자듯이 자주 깨는데 외국이라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그 나라에 정신과 전문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내가 영어를 잘 한들 이 상황을 어떻게 남의 나라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밤은 긴데 잠은 오지 않으니 매일밤 귀는 즉문즉설을 듣고 눈은 블라인드 결혼 게시판을 읽었다.




이혼, 신혼이혼, 성격장애,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정신병, 정신과, 자살...... 별의별 키워드로 다 검색을 해봤다. 혹시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을까, 나보다 먼저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결됐을까. 당연히 나 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신혼이혼으로 검색하면 대부분 성격차이로 맨날 치고받고 싸우는 게 지쳐서 이혼하고 싶다, 둘 다 제 성질 못 이겨 씩씩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혼 이야기는 굳이 검색해서 읽지 않아도 뻔하고 흔한 레퍼토리였다. 고부갈등, 경제 문제, 폭력과 주사, 외도. 애 있는데 이혼해도 될까요? 애 없으면 당장 이혼할까요? 자기 인생을 왜 인터넷에다 물어보고 있지 싶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자기 인생을 왜 인터넷에서 검색하고 있지 싶은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나가 쓴 글은 이혼 고민 글이 아니었다. 남편이랑 싸웠는데 이해가 안 된다고, 혹시 내가 이상한 건지 진짜 모르겠으니 제발 객관적으로 판단해 달라는 글이었다. 이미 달린 댓글에는 주작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이 글이 사실이라면 남편은 정신병자라고 난리가 났다. 그 정도로 이상했다. 나는 거기서 익숙함을 느꼈다. 이건 분명 내 남편이다. 내 남편에 대한 이야기다. 내 남편이랑 너무 비슷한 상황이었다. 댓글을 달았다. 혹시 쪽지 보내도 되나요? 저랑 너무 비슷한 경우라서요.


내가 있던 곳은 새벽 4시였다. 나는 남편이 출근하는데 불편할까 봐 침대를 양보하고 빈 방의 방바닥에서 잤다. 아직 신혼짐 컨테이너도 도착하지 않아서 소파도 의자도 없었다. 나나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앉을 데가 없어 화장실 변기에 앉아 휴대폰 불빛에 의지한 채 열심히 메시지를 입력했다. 화장실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새벽 4시에도 한여름 무더운 기운이 아래층부터 후끈후끈 올라왔다. 그 집은 가뜩이나 꼭대기층이라 더 더웠다. 땀줄기가 이마를 타고 내려갔다. 숨이 턱 막히는 게 후덥지근한 열대야 더위 때문인지 내 상황 때문인지 혹은 동지를 발견했다는 기쁨 때문인지 이유는 몰랐다.




우리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부부상담을 권해서 나나는 부부상담도 받았다. 나는 그때 남편의 화가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나는 부부상담을 받으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 다 순진했고 바보였다. 나나한테는 나처럼 시어머니 심부름 같은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정신적으로 미성숙했고 정서 불안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로 짐작컨대 나르시시스트 남편이었다. 나나의 상담 선생님도 그렇게 보는 것 같았다. 어느 장단에 기분을 맞춰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갑자기 폭발하고, 남들 앞에서는 항상 좋은 사람인척했다. 그리고 나나를 정서적으로 학대하듯이 가스라이팅을 했다. 별 것도 아닌 걸로 트집을 잡으면서 분위기를 항상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나나는 연애 시절에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하고 전혀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혹시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자꾸만 엉뚱한 데서 자아성찰을 하고 자기반성을 했다. 나도 그랬다. 그녀는 나 같았고 나는 그녀 같았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원가정도 굉장히 화목하고 형제끼리 친한 것도 똑같았다. 게다가 시아버지가 아들을 통제하는 스타일인 것도 똑같았다. 아 이게 어쩌면 패턴일 수 있겠구나. 그때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서로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나는 그 무렵 철 지난 드라마 또오해영을 보고 펑펑 울었고, 나나는 드라마 마스크걸을 봤다. 그래서 나는 서현진, 나나는 나나라고 서로를 부르기로 했다. 아직 브런치에 글을 쓰지 않았을 때라서 은연주라는 필명도 없었다. 그래서 나나는 나를 현진이라고 불렀다.




나나는 오늘 드디어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왔다. 현진아 그나저나 너는 진전이 좀 있어? 아니 나는 진전 없어. 그대로야. 아직도 연락 없어. 너무 축하해! 잘됐다! 앞으로 훨훨 날아. 항상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랄게.


나는 나나보다 더 먼저 험한 일을 겪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미적지근 이렇게 이혼을 안 하고 평생 남편 없는 법적 유부녀로 살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대학병원 치료가 오히려 내 이혼에는 방해만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얼굴도 모르는 친구의 이혼을 이 정도로 같이 기뻐해주고 그녀의 앞날을 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씁쓸하게 만든다. 그만큼 나도 내가 빨리 이혼하기만을 바라고 있구나. 힘들 때 의지된 소중한 친구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나도 얼른 나나처럼 해방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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