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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끝 없어"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포장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남편을 쾌남이라고 생각했다.

by 은연주 Mar 21. 2024



내가 3년간 남편을 만나며 봐온 모습은 항상 일관적이었다. 이 정도의 기간은 어떤 사이코패스라도 연기할 수 없는 시간이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가볍게 만난 연애가 아니었다. 3년 동안 서로 온갖 개고생 하는 데이트만 했다. 한 번도 편한 데이트를 한 적이 없다. 공주님처럼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아서 강남 시내를 누빈 적도 없고 하이힐을 신고 2시간짜리 코스 메뉴를 먹어본 적도 없다.


우리의 추억은 3년이라는 세월 사이에 밀도 있게 켜켜이 쌓여있었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는 거의 다 들려봤고, 텐트가 강풍에 날아갈 뻔한 적도 한겨울에 침낭을 깜빡해서 밤새 갯바위에서 입 돌아갈 뻔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힘든 상황에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연인과 결혼하기 전에 힘든 여행을 떠나보라’ 이런 식의 조언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내 몸뚱이의 절반만 한 배낭을 메고 둘이서 제주도 올레길을 걸을 때도 한 번도 찡그린 적이 없었다. 둘 다 걷는 걸 워낙 좋아했다. 남편은 일찍이 혼자서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었고 우리 둘 다 각자 히말라야도 다녀왔었다. 그래서 내 운명의 반쪽이라고 생각했다. 털털한 내가 드디어 찾은 진짜 상남자. 남편은 그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쾌남이었다.




'내 남편은 아스퍼거'라는 일본 작가가 쓴 만화책을 보면 남편과 비슷한 특성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 만화책의 남편은 집돌이에 가깝다. 아스퍼거 배우자들의 카페를 둘러봐도 대부분의 남편들은 내향적이고 집돌이에 사회성이 없다. 내 남편은 달랐다. 연애 시절 우리는 정말 매주 여행을 안 가면 큰일 나는 사람들처럼 열심히 싸돌아다녔다. 물론 나는 가끔 집에서 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남편이 그걸 못 견뎌했다. 혼자라도 꼭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로 도시가 싫고 답답한가 보다 하고 내버려 뒀다. 혼자서 낚시를 가든 캠핑을 가든 터치를 하지 않았다. 둘 다 독립적인 성격이라서 가능했던 연애였다.


연애 초반에 남편은 나에게 자신에 대해 미리 알아야 할 점, 혹시라도 주의할 점 등을 말해줬다. "나는 뒤끝 없어. 싸워도 다음날 아침이면 다 까먹어. 그래서 뒤끝 있고 감정적인 거 불편하고 힘들어. 너도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게 아마 뒤끝 없어 보이긴 하지만 감정적으로 징징거리고 그러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도 뒤끝 없는데 잘됐다 싶었다. 서로 가끔 꽁하거나 어색한 기류가 돌아도 남편은 정말 뒤돌면 기분이 풀려있었다.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존감이 높아 보였다. 단지 남편은 아버지와 관련된 상황에서만 예민해졌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경향이 있었다. 아버님이 나쁜 분도 아니고 남편을 학대를 한 적도 없는데 유독 남편만 아버지를 힘들어하고 싫어했다. 상성이 달라서 부딪히나 보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궁합이라는 게 존재하니깐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돌변했을 때, 나는 남편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남편은 그 상황을 대화로 해결하는 능력이 없어서 외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그동안 자신은 뒤끝이 없어서 잠자고 일어나면 다 까먹는다고 포장했던 것이다. 연애 시절 우리는 취향이 똑같아서 싸울 일이 없었다. 부딪히거나 문제 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이 일을 겪고도 그를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정상이 아닌 남편을 두고 거의 반년 넘게 안쓰럽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뒤끝 없다고 말했던 그가 실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알고도 일부러 포장하고 숨긴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배신감과 원망 같은 지저분하고 끈적한 감정이 나를 집어삼켰다. 다 떨쳐내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곳곳에 모든 것들이 남편과 연관된 기억들 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남편 생각이 난다. 그립다는 마음보다는 명탐정 코난이라도 된 듯이 그때 그게 혹시 이런 거였을까 계속 추측만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은 다 쓸데없고 나를 갉아먹는 마음의 벌레 같은 존재라는 거 잘 알고 있지만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다 태울 순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 둔다. 오늘 하루쯤은 벌레가 내 마음 조금 갉아먹어도 될 것 같다. 내일은 어차피 내일의 해가 뜨겠지. 나야말로 남편이 말했던 것처럼 내일 자고 일어나면 아무 기억도 안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 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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