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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있고 '우리'는 없는 사람

남편에게 '우리'란 영원한 평행선일 것이다.

by 은연주

니 것과 내 것에 대한 선긋기가 너무 또렷해서 결혼해도 영원히 우리가 될 수 없는 사람. 요즘 사람들 반반 결혼 많이 하고 결혼해도 통장 안 합치고 각자 벌어서 각자 쓴다는데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얼핏 대충 들으면 절대 손해 보기 싫어하는 이기적이고 치졸한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보이겠지만 그거랑은 조금 다르다. 남편은 돈관리를 잘하지 못했다. 그냥 돈을 안 쓰니깐 쌓여있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구두쇠 영감처럼 절대 지갑을 안 여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밖에서 친구들 만나면 계산은 자기가 하려고 했다. 친구들은 자기보다 돈도 못 벌고 힘든 애들이니깐 도와주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와 나는 동등하고 남녀는 평등하니깐 반반씩 내자고 했다. 그러고는 자긴 돈이 필요 없다며 남한테 쉽게 빌려주기도 했고 그 돈을 못 받아도 화내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듣자 하니 나와 만나기 전에 그런 남편에게 손 벌린 사람들이 이미 꽤나 많았다.


-그럼 어떻게 했어? 돈 빌려달라고 할 때마다 그 사람들한테 거절했어?

-아니 다 빌려줬어.

-빌려간 사람들이 돈은 제대로 갚았어?

-갚은 사람도 있고 안 갚은 사람도 있고. 반반 정도 되는 것 같아.

-안 갚은 사람들이랑은 어떻게 했어?

-아직도 계속 잘 지내는 사람도 있고. 연락 안 하는 사람도 있고. 근데 돈 안 갚고 잠수 탄 사람들은 어차피 나도 필요 없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빌려주지를 말든가 빌려주면 끝까지 받아내든가 안 갚으면 쌩까든가. 상대방이 뻔뻔하게 돈을 안 갚는데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아무 말 없이 잘 지내는 남편의 인간관계가 약간 의심됐다. 하지만 모두 나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엄연히 따지면 남의 돈인데 굳이 시빗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기도 그렇게 함부로 돈 빌려줘보고 데인 뒤에 크게 깨달은 게 있겠지. 이제는 안 그러겠지. 단지 앞으로 결혼하면 경제권은 되도록 내가 가져와서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결혼한 뒤에 시부모님께서는 이제 독립하는 장남을 금전적으로 조금 도와주시려 했다. 아들이 가정을 꾸리고 새 출발 할 때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해주시려고 했다. 감사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걱정됐다. 남편 주변에 친구 같지도 않은 애들이 친구랍시고 돈을 빌릴까 봐 걱정됐다. 그래서 며느리가 감히 시부모님께 밥상머리에서 따로 부탁을 드렸다. 남편은 야근한다고 빠져서 셋이서만 식사하는 자리였다.


아버님 어머님, 저희 도와주지 마세요. 금전적으로 오빠한테 도움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 아직 젊고 둘 다 일하고 있으니깐 저희끼리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 수 있어요. 도와주시려는 마음은 너무 감사하지만 솔직히 아직은 오빠한테 여윳돈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게 이상한 데로 갈 것 같아서 걱정돼요.


그게 무슨 말이냐?


세상 어떤 며느리가 시부모님께서 금전적으로 도와주신다는 걸 싫어하겠는가. 나는 도움받는 걸 부담스럽고 불편해하는 성격이 아니다. 누가 예쁘다고 칭찬해 주면 오 땡큐! 하는 능청스러움 한 스푼에다가 스스럼없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받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부끄럽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나이 서른 넘도록 뻔뻔하게 엄마한테 용돈 받는 철부지였다. 시부모님께 남편 친구 A가 남편에게 사업을 하겠다며 1억을 빌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너무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아프거나 가세가 기울어서 힘들어진 것도 아니고 큰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사업을 하겠다며 1억을 친구에게 빌리는 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됐다. 사업은 내 돈으로 하는 거고 내 신용으로 대출을 받아도 할까 말까 신중하게 생각해야 되는 건데 세상천지에 친구한테 돈을 꿔서 사업을 해보겠다는 사람도 있구나. 내가 혹시 사업의 뜻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남편이 생각하는 친구의 기준이 다르거나 그 친구가 친구가 아니거나. 아마도 둘 다라고 생각했다.


이미 그때는 결혼식을 올린 직후라서 이 남자의 경제관이 이상하다고 결혼을 무를 수도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있던 내 돈 1억인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라고 묻는 남편이 논리적으로 틀린 건 없었다. 뭐라고 답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대신 시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시부모님도 남편이 친구에게 1억을 빌려준 사건에 적잖이 충격을 받으셨다. 그리고 바로 며칠 뒤에 나의 이혼 사건이 터졌다. 지금쯤이면 남편의 풀배터리 검사 결과는 나왔을까. 뭐라고 쓰여있을까 너무 궁금하다. <내 남편은 아스퍼거>라는 만화책에서 본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이 떠오른다. 아스퍼거에게 가족이란 결혼을 해도 '나와 아내'가 아니라 영원히 '나와 엄마'만 있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분명 그런 것 같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를 싫어했고 어머니에게 정서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자기를 이해해주지 않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증오가 깊어 보였다. 그리고 나를 자기 엄마와 비슷하다고 좋아했다. "넌 진짜 우리 엄마랑 똑같다." 남편이 연애 시절에 내게 툭하면 자주 했던 말이다. 물론 내가 실제로 봐도 나와 시어머니는 꽤 비슷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그 말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익숙해서 좋은가보다 했다.


어쩌면 나는 천운으로 저 지옥도 같은 가족관계도 그림에서 일찌감치 빠져나오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예뻐해 주셔서 미리 구해주신 걸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 번도 남편의 '우리'에 속했던 적이 없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가 아니라 '자기 것'이었다. 하지만 '내 것'이 감히 자기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 없어져서 유기했을 것이다. 그게 아마 남편의 정신 상태에 대한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다. 남편의 논리는 틀린 게 없다. 남편의 세계에서 그는 항상 옳으니깐. 그래서 나는 이게 사기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왼쪽은 아스퍼거 남편의 가족 관계도. 오른쪽은 일반적인 가족 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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