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용 새 번호를 만들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두 분은 언제 연락하세요? (아 회사에서 연락 자주 안 하시는 것 같으시길래요~)
-연주님 이렇게 야근 많이 하는 거, 남편분이 우리 회사 안 싫어하세요?
-연주님은 아이 생각 없으세요?
-연주님 남편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예요?
나는 남들에게 내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건 아마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어른들의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나는 아빠가 누군지, 아빠 직업을 알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관심과 특별하다는듯한 반응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오랜 친구들도 서로 아빠가 뭘 하는지 잘 몰랐다. 어차피 내 친구들도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애들이었다.
그런데 전 직장 인턴의 "연주님은 기혼이세요?" 한 마디에 무기력하게 그렇다고 대답한 뒤로 다들 아무렇지 않게 내 남편에 대해 너무 쉽게 물어봤다. 내 사생활에 관심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차라리 결혼 10년 차 정도의 해묵은 기혼이었다면 그 관심이 덜했을까. 하필 신혼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 다니지 않은 새 회사에서 낯선 사람들의 관심을 몹시 많이 받았다.
퇴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옆팀 팀장님과 작별 인사 명목으로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대화 도중 팀장님은 조심스레 내가 어느 회사로 이직하는지 물었다. 회사명을 들은 팀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도 나처럼 번호 하나 더 파야겠다~"
팀장님은 휴대폰 하나에 번호 두 개를 쓴다면서 내게 회사용 번호에는 카카오톡이 연동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esim으로 듀얼넘버를 쓰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며 어떻게 가입하는지도 직접 보여주셨다.
"우리 회사는 젊은데도 참 선 넘는 질문들을 많이 해 사람들이. 안 그래?"
"여기만 그런 건 아니죠 뭐. 그래도 제 전직장보단 훨씬 나은 것 같아요. 전직장은 진짜 남 얘기 하는 거 좋아했거든요. 가십 루머 엄청 좋아하고요."
"하긴 우린 일단 다들 일이 많아서 그렇게 쓸데없이 남일에 관심 가질 시간은 없긴 해. 그래도 그런 얘기를 별 뜻 없이 묻고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어요. 그런 사람들만 잘 피하면 되는데. 아무튼 연주님, 새로 가는 그 회사는 귀찮게 이것저것 묻고 호구조사하고 그런 거 심할 거야 아마. 워낙 유명하잖아."
점심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알뜰통신사에서 가장 저렴한 요금제로 esim 새 번호를 개통했다.
서울 아가씨가 왜 여기까지 내려왔나? 결혼은? 가족들이랑 같이 왔나? 아마도 첫 출근을 하면 다들 제일 먼저 물어보겠지.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그깟 종이쪼가리에 아랑곳 않고 '1인 가구, 싱글 여성'이라고 대답해야지. 이미 어떻게 말할지 혼자서 연습도 해뒀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누가 남자친구 있냐고 묻거든 "연애 관심 없어요. 퇴근하고 강아지랑 산책하는 지금이 딱 좋아요." 거짓 하나 없는 순도 100%의 솔직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깐 가슴 정중앙을 콱 짓누르는 커다란 우울 덩어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사를 며칠 앞두고 인사기록 시스템에 미리 접속해서 개인정보를 등록하는데,
*미혼☐ 결혼☐ -체크하시오
*취미:
*특기:
*가족관계 -배우자 이름, 주민등록번호:
항목을 보고 마음이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미혼과 결혼 중 어떤 걸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결혼을 클릭했다.
*미혼☐ 결혼☑
그랬더니 이번에는 옆에 새로운 선택사항이 뜬다.
*미혼☐ 결혼☑ -> 결혼기념일 ____년 __월 __일
하얀 창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나는 미혼☑ 결혼☐ 으로 선택해서 제출했다.
이혼 소송 중일 때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정답일까? 난 아직도 모르겠다.
대신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게 일하는데 꼭 필요한 정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