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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연주 Jan 28. 2024

세탁기를 돌려놓고

내 기억도 다 지울 수 있다면 좋겠는데.

부끄럽게도 일요일 오후가 돼서야 1주일 만에 밀린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지난 한 주 동안 집에서 단 한 끼도 챙겨 먹지 못했으니 설거지거리가 많이 쌓여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 일요일에 내 생일을 축하해 주러 왔던 친구들의 흔적이라서 고작 컵 몇 개에 그릇 두어 개뿐이었다. 그런데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에 오면 겨우 내 몸 하나 씻을 힘밖에 없었다. 비타민도 종류별로 챙겨 먹고 있는데 입술에 물집이 잡히고 코피까지 났다. 이대로라면 회사를 몇 달 다니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이틀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고,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주말 계획은 토요일엔 하루종일 밀린 잠을 자고, 일요일엔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주말 이틀을 내리 잠만 잔다면 억울해서 월요일에 당장 사표를 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겨우 몸을 일으키고 세탁기를 돌렸다. 벌써 오후 두 시였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설거지를 끝내놓고 카페에 갈 참이었다. 따뜻한 물로 접시를 푸욱 불렸다가 수세미로 뽀득뽀득 씻어내면 내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청소를 좋아하지만 정리정돈에 서툰 편이라서 그릇 정리는 못해도 설거지는 좋아했다. 그래서 남편과 같이 살 때도 내가 요리를 하면 남편이 먼저 나서서 설거지를 해줬는데 내심 그게 영 미덥지 않았다.


형평성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고맙다는 말 대신 '니가 요리를 했으니 내가 설거지를 하는 게 정당하고 평등해'와 같은 논리로 설거지를 고집했다. 하지만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항상 기름기가 제대로 안 닦여 있거나, 심지어 고춧가루가 그대로 묻어있기도 했다. 설거지를 해준 건 고맙지만 일을 결국 두 번 하게 되니 나로선 짜증 날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요리도 설거지도 안 하면서 밥 타령이나 해대는 다른 남자들보다야 훨씬 나았다. 게다가 남편은 설거지보다 요리를 더 좋아했고 잘했다. 남편의 형편없는 설거지 솜씨를 추억하며 설거지를 다했는데 뭔가 뒤통수가 싸했다. 싱크대 수도꼭지를 잠갔더니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이상하다. 분명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세탁기 세제까지 다 넣어놓고선 정작 시작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멍청해진 내가 너무 한심해서 세탁기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자꾸 안 하던 실수를 할 때마다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났다. 세탁기에 내 뇌도 같이 넣고 돌리고 싶었다. 그러면 머릿속에 찌든 때가 조금이라도 빠져서 예전처럼 또렷한 정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탁기 모터 소리가 내 울음소리를 감춰주는 것 같아 세탁기 앞에 30분은 쭈그리고 앉아있었던 것 같다.


한바탕 울고 나니 실없게도 배가 고파졌다. 목도 말랐다. 커피 수혈이 필요했다. 눈물 흘린 자국 때문에 볼이 따가울까 봐 세수도 안 한 얼굴에 알로에 크림만 바르고 집밖으로 나왔다. 카페로 가는 길, 한 것도 없는데 주말이 다 지나간 일요일 오후 4시 22분의 풍경은 마치 나 같았다. 아파트 단지의 소나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미련스럽게 지는 해를 붙잡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빨래 바구니에 기억을 쌓아둔 채 과거의 흔적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내가 참 한심해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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