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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게 보약일까 사약일까

엄마의 꿈 이야기

by 은연주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얼마 전에 이상한 꿈을 꿨다고 했다. 남편은 50대 중반 내지는 6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나란히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길에 서있던 어떤 예쁘지도 않고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고 했다. 여자는 커리어 우먼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남편의 시선이 그 여자에게 고정되어 눈을 떼지 못했다. 남편과 같이 걷던 중년 남자는 길에 서있던 여자의 아빠 같았다고 했다. 부녀 지간처럼 닮았다고 했다.


엄마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 꿈속에서조차 너무 분하고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고 했다. 감히 내 딸을 유기하고선 빠른 시일 내에 재혼이라도 하는 걸까. 그 나라에 그새 몰래 현지 처라도 얻은 걸까. 다른 여자 생긴 게 아니라면 어찌 이리 한 순간에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가 있느냐 말이다. 엄마는 일어나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꿈 얘기를 전하며 “내가 길동이 한 번 만나볼까?” 물었다.




이미 아빠가 지난가을에 남편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나눠봤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처럼 완전히 변해있었다고 했다. 아빠는 남편과 이야기하는 한 시간 내내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1톤 시멘트 벽에다 대고 혼잣말을 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엄마에게 됐다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냐고 만류했다. “아빠가 벌써 말해봤잖아. 만나봤자 엄마만 더 상처받아. 그러지 마.”


나는 엄마가 걱정할만한 이야기를 일절 한 적이 없다. 내 잘못도 아닌데 부모님 얼굴 보기가 미안해서 죄인 된 마음으로 반년 간 가족을 등졌었다. 아빠는 엄마가 마음이 너무 여려서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이 얼마나 아픈지, 시댁은 어떻게 피해보상을 해주겠다는 건지 엄마는 모른다. 사실 나도 모른다. 아빠가 너도 이제 더 이상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나는 내 치료에만 신경 쓰라고 했다. 다시 웃고 건강해질 생각만 하라고. 열심히 일하고 강아지만 돌보라고. 남편 생각도 시댁 생각도 말라고. 나머지는 아빠가 다 지켜주겠다고. 그래서 우리 엄마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엄마는 꿈자리가 잘 맞는 편이다. 평소에는 꿈을 잘 꾸지 않는데 종종 아주 가끔씩 꾸는 꿈들이 마치 예지몽 같을 때가 있다. 옛날에 엄마 몰래 해외 인턴을 준비할 때 합격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엄마가 미리 꿈을 꿨다. 내가 어디 멀리 외국으로 떠나는 꿈을 꿨다며 엄마는 대뜸 나한테 여행이든 뭐든 어디 갈 생각 말고 한국에서 취업 준비나 하라고 엄포를 놨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께 인턴 계획을 말한 적이 없어서 혹시 엄마한테 무슨 무당처럼 촉이라도 있는 걸까 깜짝 놀랐었다. 만약 이번에도 엄마 꿈자리가 맞는 걸까. 시아버지가 결혼 전에 남편 사주를 봤을 때 니 사주에 좋은 여자는 니 나이 서른아홉, 마흔쯤 온다고 했다. 그게 지금 남편 나이다. 엄마는 그 사주를 꿈으로 꾼 걸까. 남편은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나를 갖다 버렸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 그 약이 보약일까 사약일까. 나는 지금 나아지고 있는 중인 걸까. 보이지 않는 작은 바람에도 또 무너진다. 모래성 위에 탑을 쌓는 기분이다. 다 관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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