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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빠진 결혼

말뿐인 삶은 지긋지긋하다.

by 은연주

우리는 살다 보면 책임감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다. 수많은 회사의 인재상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소개팅할 때 이상형을 물어보면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경우도 많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나는 책임감 높은 사람을 좋아했다. 내게 책임감이란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것, 또는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그래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말만 하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굉장히 책임감 높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3년 간 옆에서 겪은 그의 모습은 실제로 책임감이 높았다. 단순히 장남이라서 그렇다기엔 때로는 장남인 걸 부담스러워하고 가끔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원래 책임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말은 뱉으면 사라진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기 싫다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편지를 그토록 좋아하는 내게 3년 동안 고작 단 한 번 편지를 써준 사람이다. 하지만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편지 대신 내게 행동으로 많이 보여줬다. 나는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어차피 편지 같은 감수성 영역은 이미 공감대 쌓인 친구들과 나누는 게 더 빠르고 수준 높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가 정말 책임감 하나만큼은 뛰어난 남편이자 아빠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우리가 결혼 전 부부상담에서 받은 남편의 심리 검사 결과지에서도 책임감 항목이 무척 높게 나왔었다. 설마 검사를 속일 수 있을까? 검사지는 수백 문항이나 되는 데다가 응답에 일관성이 없다면 검사 결과의 신뢰도가 떨어지게 나왔을 것이다. 그때 선생님이 해석해 주신 남편의 성향이나 성격은 내가 이미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는 괴물 버튼이 눌리지 않아서 비록 강박증, 편집증 같은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 허풍 떠는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조차도 거울 속 제 모습을 볼 줄 몰라서 자기도 그런 사람이 싫다 말할 것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내가 봤던 남편의 책임감 있는 그 모습은 무엇이었는지. 그에게 책임감이란 무엇인지. 그도 책임감 없는 사람을 싫어하는지. 자기 자신을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보는지. 칼로 무 자르듯 나를 내동댕이 친 그가 자기 멋대로 이혼이라는 확고한 선택을 한 후에 보여준 행동은 단지 넷플릭스와 유튜브 가족 계정에서 '탈퇴하기'와 나를 인스타그램에서 '차단하기'였다. 이게 그의 진짜 책임감이다.


아무리 아파서 사고 회로가 고장 났다고 해도 책임감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을 먹는 것도 자기 몸에 대한 책임감이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양치를 하는 것도 그날에 대한 책임감이다. 나는 지금 남편으로 인해 심각한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우울증이 최고로 심각했던 지난가을엔 나 역시 그런 당연한 책임감을 다하기 어려웠다. 4일 동안 샤워는커녕 세수도 안 하고 방바닥에 누워만 있기도 했다. 나를 돌보지 않았고 나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이마저도 나의 책임감으로 받아들였다. 내 인생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 이런 상황을 예상한 적 없지만 그를 사랑해서 결혼했다. 그 결과가 비극이라서 괴롭지만 그래도 나는 기꺼이 내 사랑의 최후를 책임지고 있는 중이다.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이 감정들을 하나씩 세세히 다 느끼고 있다. 그는 아직도 매일 강아지를 데리고 하루 두 번의 산책을 나간다. 그는 여전히 몹시 책임감 높은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겨우 일회용품 같은 존재였을 뿐이겠지. 그래서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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