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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억울함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남의 업보를 내가 없애주기 위해 애쓰지 말자.

by 은연주

매일 글을 쓰면서 나는 그동안 많이 의연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지 강아지 한 마리가 왔을 뿐인데 내 일상은 하루 만에 처참히 무너졌다. 3개월 된 어린 강아지가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는 감정은 몹시 당연한 건데, 정작 내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마음이 먼저 크게 요동치고 말았다.


동생은 불안해하는 내 태도가 앞으로의 나에게도 강아지에게도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세나개 애청자였던 나도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이다. ‘분리불안은 강아지가 아닌 보호자들이 느끼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는 농담으로 받아쳤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어제오늘 하루종일 강아지를 보며 흔들리는 내 마음이 혼란했다.




언제나 성인 애착 유형 검사를 하면 안정 애착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상한 남편 때문에 이제는 불안형 애착으로 변해버리기라도 한 걸까. 강아지를 입양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공허함을 외로움이나 허기로 착각하고 아무나 만나고 여기저기 무의미한 모임에 나갔으면 어땠을지 상상했다. 판단력이 흐려져서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만 두고 함부로 인연을 맺으며 인생을 허비했겠지. 멀쩡했던 판단력은 물론이고 내 자존감, 자아를 완전히 망쳐버린 남편이 다시금 원망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영원히 억울해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질까? 억울함이 사라질까?


은연주라는 이름이 조앤롤링처럼 문학계에 한 획을 긋더라도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건 마침내 이혼 도장을 찍는 날 인생 정말 크게 액땜했다며 홧김에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되더라도, 7년 뒤쯤 정신 멀쩡하고 잘생긴 연하의 돌싱 남자친구가 생기더라도, 앞으로 남편의 인생이 지금보다 불행하더라도, 혹은 오히려 잘 풀려서 잘 먹고 잘살더라도 마찬가지다. 모두 다 내 억울함과는 전혀 상관없다. 내가 다시 웃고 떠들고 먹고 싶은 게 생기고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더라도 억울한 건 억울할 뿐이다. 원통함은 그저 원통할 따름이다.




피고름을 짜내는 심정으로 매일같이 글을 썼지만 뒤돌아보니 글을 쓴다고 이런 기분이 사라져 있진 않았다. 시아버지는 내게 시간이 이 정도 지났으면 조금 괜찮아졌을 줄 알았는데 내가 여전히 감정적이라고, 아직 내가 어리다고 지적하셨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이제 뒤를 보지 말고 앞만 보고 살라고 하셨다. 물론 그런 말씀을 하신 시아버지께 악감정은 없다. 그분은 그저 다정보다는 냉정, 감성보다는 이성적인 분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분이다. 남편은 그런 시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정말 시아버지의 말씀이 옳을까. 내가 감정적이라서 이 억울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이 정도'라는 시간은 얼마만큼의 시간인 걸까. 내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있으면 이런 기분이 안 들까.


천만에. 나는 앞으로 지금보다 더 잘 살아도 원통하다. 내가 다시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고 이 억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억울해하지 않길 바라는 건 시부모님뿐만 아니라 엄마 아빠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자식이 한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을 어느 부모가 원하겠는가. 하지만 생각해 보니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이미 생긴 일이 없어질 수 없는 법이다. 남편이 결혼식 끝난 후에 돌변한 일, 상식적이지 않은 이유로 남편에게 유기당한 일, 그가 편집증과 강박증으로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일, 신혼생활을 누려보기도 전에 이혼으로 번지점프해 버린 일. 이미 발생한 일이고 지나가버린 과거이므로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내 원통함도 없던 일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혼인 관계의 결말을 미리 알아버렸다.


판타지 소설처럼 남편이 후회하며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더라도 내 한의 정서가 사라질 순 없으니 이 결혼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불안해지고 연약해진 내가 과거 회상을 사랑으로 착각해 재결합하더라도 살다 보면 상처가 또 욱신거릴 것이다. 그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어 나만 지옥에서 살겠지. 이렇게 상상하며 글을 쓰는 지금도 손발이 달달 떨리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보니 어차피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다. 나는 이제 두 얼굴을 가진 남편이 무섭다.


사실 남편이 주장하는 그의 온갖 억울함도 외부의 시선에서 남들이 이해할 수 없을 뿐이지 그에게는 온전한 그의 감정이다. 그러니 그의 억울함도 나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꾸준히 치료받길 바라지만 만약 치료가 잘 되더라도 평생 살아오며 쌓아온 그의 억울함들과 피해의식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마음의 상처가 무척 많다.




글을 쓰며 내가 얻은 건 남편에게 쓰던 마음을 나 자신에게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밖에 없다. 나부터 착각하고 있었다. 억울함은 그대로였다. 아마 영원할 것이다. 나부터 이 상처가 없어지길 바라지말자. 차라리 흉터를 자랑스러워하는 연습을 하자. 다만 앞으로 평생 억울함을 끌어안고 비참하게 살겠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기엔 내 인생이 매우 아깝다. 나는 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처럼 많은 것들을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단지 내가 괜찮아지는 것과 이 억울함이 사라지는 건 무관하다고, 바꿔 말하면 그게 바로 그의 카르마, 업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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