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제대로 속은 기분
내가 남편을 끊임없이 이해해 주고 배려해 준 결과는 갑자기 순식간에 내 뒤통수치고 사라지기. 그에게 이 결혼은 뭐였을까. 그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풀리지 않는 고민을 나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던 시간이 있다. 사실 그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인데도 믿을 수 없어서 자꾸만 이 현실을 의심한다.
남편이 도대체 어디가 아픈 걸까 미친 듯이 인터넷을 검색하고 책을 뒤져 읽을 때, 나는 마치 환자가 자기 병에 대해 찾아 헤매는 것만큼 간절했다. 이유를 알아야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네이버에 어떤 카페를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남편과 비슷한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아니 정확히는 남편 같은 배우자를 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다들 나 같았다. 그들은 미래의 나였다. 내가 가입 인사글을 남겼을 때 달린 수십 개의 댓글은 조상신이 도왔다, 천운이다, 아이 없다니 복 받으셨다, 얼른 추스르고 자기 인생 살아라였다. 다들 자기 피눈물 흘리며 달아준 댓글일까. 댓글에 피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았다.
카산드라 증후군이라는 책을 읽었지만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카페에는 모든 경험담이 생생하게 담겨있었다. 내 미래가 저랬겠구나.
남편들이 이혼을 안 해줘서 답답하다고. 너무 이혼하고 싶지만 소송 이혼 사유로는 명확하지 않은데 협의 이혼을 안 해준다고. 남편이 자기한테 손해 되는 일은 절대 안 한다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서 선의의 배려나 희생은 절대 없다고. 아내가 쓸모 없어져야 버린다고.
어? 뭐지. 나는 왜 버림받았지. 시어머니 심부름 하나 했다고 한순간에 남편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고작 이까짓 거라는 생각을 하니 비참했다. 이럴 거면 도대체 결혼 왜 했어? 마음속에 진 응어리가 영 풀리지 않는다. 니 멋대로 혼자 살지, 왜 결혼을 해서 우리 가족한테 이렇게 큰 상처를 주는 거야? 그의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다. 하지만 그래봤자 전혀 타격 따위 받지 않았다는 듯 무표정한 남편을 보고 나만 또 충격받을 것이다. 결국 나만 주저앉아 세상이 망한 듯 울겠지. 니 억울함은 니가 알아서 달래라고, 니 감정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말하고 대수롭지 않게 등 돌리고 가겠지.
결혼 전 남편과 이야기하다가 이혼이 주제로 나온 적이 있다. 남편은 자기가 아는 여자가 최근에 아직 어린애를 데리고 이혼했다고 말했다. 그 여자의 직업은 변호사였다. 나는 그래도 둘이 사는 것보다 혼자 애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나 보지. 먹고살 걱정 없으니깐 이혼했겠지.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아무리 그래도 이혼은 절대 아니지. 내 인생에 이혼은 없어.“ 라고 말했다. 의외였다. 연애 시절 남자친구로서 그가 내게 보여준 모습은 항상 쿨했다. 그는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않았다. 사랑이 식으면 뒤에서 바람피우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헤어질 거라고, 마치 미국인처럼 말하던 남자였다.
나도 당연히 이혼은 없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 이혼을 염두하고 준비하는 예비신부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나는 나중에 불행을 견디면서까지 이혼을 벌벌 떠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직업, 경제력, 한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종속되어서 내 운명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나도 이혼은 안 하고 싶어. 그렇지만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당연히 해야지. 예를 들어 바람, 폭력, 도박, 성매매.“
남편은 다시 말했다. “아니 아무튼 이혼은 없어. 이혼은 절대 안 해. 너는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
우습지만 사실이다. 차라리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게 경험담이 아니라 콩트 대본이면 좋겠다. 그때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뭐가 진짜 네 모습이야? 나는 실체 없는 남자의 가짜를 사랑하고 믿어서 평생을 약속했다. 결혼이 장난이었던 남자한테 인생을 걸었다가 혼자서 뒷수습을 해야 하는 지금 내 꼴이 너무 자존심 상한다. 누가 그의 뇌를 설명해 주면 좋겠다. 일반인이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