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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더 괴로울 때

부디 내일은 내 마음이 잔잔하기를

by 은연주

어제 밤사이 총 네 번이나 깼다. 새벽 2시, 3시, 5시, 5시 50분. 제대로 푹 자지 못 했다. 눈을 겨우 뜨고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확인할 때마다 짜증이 쌓였다. 게다가 중간에는 꿈도 꿨는데 시간 배경은 연애 시절이고, 남편이 바람피운 걸 알게 돼서 꿈인데도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스러운 기분을 생생히 느꼈다.


결혼식 직전에 여자의 촉으로 그가 사는 나라의 현지인 여직원이 은근히 거슬렸는데, 그 여자가 바람피운 대상으로 나와서 더 X같았다. 우리의 연애는 한국에서만 이루어졌으니 시간 배경과 등장인물이 안 맞아서 어차피 개꿈인 걸 알지만 어쨌든 수면의 질은 최악이었다.


푹 자야 다음 날 생활에 지장이 없는데. 어느덧 밥보다 잠이 더 보약이라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나이다. 어릴 때부터 뒤통수만 대면 쉽게 잠들던 나는 불면증을 경험해 본 적이 없고, 혹시라도 잠이 부족하게 되면 몸에서 반응이 확 올라온다.


그래서 쌩쌩했던 20대 초반에도 밤새서 놀지 않았고,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본 적도 없다. 방학 때 친구들이 밤낮 바뀐 채 드라마를 밤새 달린다거나 글을 쓰며 그들만의 고요한 세상을 즐기는 동안 나는 무조건 신생아처럼 통잠을 잤다. 항상 7시간 정도의 규칙적인 수면 시간을 지켜야만 겨우 체력이 유지되는 편이다.




어제는 저녁약을 깜빡하고 챙겨 먹지 못했다. 그래서 잠을 이룰 수 없는 답답한 밤이었다. 약이 확실히 내가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는데 도움을 주고 있나 보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아직도 약 없이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다는 게 슬프다. 지금 내가 얼마큼 우울한 건지, 내 병증이 예전과 비교해서 얼마나 괜찮아진 건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지표 같은 게 있으면 덜 답답할 텐데.


일을 쉬는 동안 계속 야금야금 까먹은 통장 잔고, 퇴직연금 ETF랑 주식을 손해 보고 팔아서 대출금을 갚은 흔적, 우울증으로 밥맛을 잃었을 때 빠졌던 몸무게, 스트레스성 폭식을 하면서 다시 고무줄처럼 늘어난 몸무게. 이게 지금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들이다.




잠을 못 잔 것뿐인데도 내가 마치 약에 의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감정이 요동친다. 나를 이렇게 만든 남편이 원망스럽고 괘씸하다. 미움, 증오를 뜻하는 세상의 모든 단어를 다 나열해도 나의 참담함은 감히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어제까지는 기분이 괜찮았는데, 오늘 이렇게 상태가 확 안 좋아진 걸 보면 그동안 약발로 버티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병 환자들의 큰 불안감은 아마 내가 약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이러다 평생 약에 기대서 살게 되는 건 아닐지, 밝고 낙천적이었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런 걱정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시어머니께 여쭤봤다. 어머니, 어머니는 살면서 언제가 제일 힘드셨어요?

지금. 대답하는 시어머니의 눈썹 위에 온 세상의 근심이 다 내려앉은 것 같이 보인다. 60년 넘게 살아온 부모님에게도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인데 나는 왜 이런 일을 벌써 겪었을까. 내 인생은 왜 이러지. 나 착하게 살아온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생각이 계속 뒤죽박죽 엉킨다. 이런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다. 괴로움을 끌어안고 살아봤자 나만 지옥인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게 더 괴롭다.


알아차림이 중요하다고 바로 며칠 전 일기에 씩씩하게 써놓고 지금 내 마음이 지옥이라는 걸, 그리고 이런 마음은 나에게만 손해라는 걸 알아버린 게 야속하다. 알아봤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내 마음이 무척 괴로워서. 오늘은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 날도 있는 거겠지. 무상.고.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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