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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했는데 혼자 한 사랑

이건 반추사고가 아니라 과거 복기를 통한 현실 직시다.

by 은연주

남편과 연애를 처음 시작한 날로부터 고작 하루 뒤, 남편은 갑자기 대뜸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 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 말을 들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사랑해'라는 말은 분명 듣기 좋은 건데 이상하게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


나는 이 남자를 아직 사랑하지 않는데? 우리가 썸을 탄 건 한 달 남짓이었고, 바로 어제부터 사귀기로 결정했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물론 썸 타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보기는 했다. 그래도 사랑을 말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나?




연인 간의 사랑의 단계나 온도, 속도는 사람마다 굉장히 다양하다. 나는 너무 느리지도 않지만, 너무 빠르지도 않은 편인 것 같다. 오히려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두는 편이라서 속도를 측정하기 난감한 쪽에 속한다.


남편 만나기 전의 과거 연애사를 잠시 떠올려보니,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냥 짧게 연애만 하고 스쳐 지나간 시절 인연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사랑인 줄 몰랐는데 끝나고 돌이켜 보니 사랑이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내 주위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많고, 아무리 세상이 흉흉해도 내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고 좋은 곳이다. 고마워, 미안해 같은 감정 표현에도 스스럼없고 맨 정신에도 친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좋은 말은 하면 할수록 좋으니깐. 좋은 기운은 같이 나누면 더 좋으니깐.


하지만 연애를 할 때는 정작 사랑한다는 말에 오히려 굉장히 조심스러운 편이었다. 너무 인색하다고 느낄 정도로 신중했다. 옛날에 잠깐 만났던 전 남자친구는 6개월 정도 만났는데, 만나는 동안 내가 단 한 번도 좋아해,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재밌었지만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으니깐.


연인을 좋아하는 감정까지는 구별하기 쉽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또 보고 싶은 사람.

그럼 사랑은 대체 뭘까? 이성 간의 사랑이 실재하기는 하나? 나는 왜 전 남자친구들한테 사랑한다는 표현을 안 했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이 세상에 정말 진실된 사랑은 부모님, 그리고 반려견이 나를 바라봐주는 눈빛 말고는 없다'라고 결론 내린 적도 있다.

나의 과거 연애는 거의 '그냥 만나니깐 만나는 거지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제부터 사귀기로 한 남자친구(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이 뜬금없고 의아했다.

이 남자에게 사랑은 뭐길래 나를 안 지 며칠이나 됐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내가 아무리 사랑을 모르고 신중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거기서 기분 나쁘거나 찝찝한 티를 내면 그가 상처받을까 봐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나도 사랑해'라는 대답은 생략하고 '고마워'라고만 답했다.




신나게 연애를 하면서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죽이 잘 맞아서 전국 방방곡곡 놀러 다니기 바빴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코로나가 한창일 때라 실내 데이트가 어려웠고, 어차피 우리는 쇼핑몰 대신 사람 없는 깊은 시골이나 이름도 안 붙은 해변만 찾아다니는 자연인들이었다.


늙으면 강남 한복판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작은 섬이나 시골 가서 살고 싶다는 소망도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 향유할 수 있는 사람, 게다가 인생관까지 이렇게 비슷하다니.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부모님께 나랑 잘 맞는 사람 아니면 굳이 억지로 결혼 절대 안 해!라고 선전포고했지만 잘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캠핑을 좋아하는 이 세상 남자들이 다 내 짝일 리도 없고. 그 정도로 남편과 나는 잘 맞는 한 쌍이었다. 그가 나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것도 아니고, 내가 남자 친구 졸졸 따라다니는 자아 없는 여자 친구도 아니었다.


친구들은 그런 우리를 보면서 천생연분이라고 평했다. 이게 사랑이구나, 나의 사랑에 더 확신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감사했다. 주는 거 없이 무조건 내 편이 생긴다는 사실, 내가 선택한 내 가족이라는 뿌듯하고 든든한 기분. 나이 찼다고 적당한 사람 만나서 결혼했으면 정말 후회할 뻔했다. 엄마 말 안 듣길 너무 잘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2년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내 편일 줄 알았던 그가 결혼 직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은 내 등에 칼을 꽂고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렸다. 추억이나 미련이나 후회도 없이, 그냥 계산기 AC 버튼 누르듯이 나를 인생에서 지워버린 그가 신기하다.


지난날, 남편 역시 나름대로 나를 많이 사랑했고, 표현은 못해도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고, 노력도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함께였고 앞으로도 쭉 함께하기로 200명의 친지 앞에서 약속도 할 수 있었다.


근데 알고 보니 그게 다 뻥이고 나는 2년간 쭉 혼자였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치료받으면 나아지지 않을까? 내 연락을 내심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집착은 나를 더 병들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더 아픈 이유는 남편 탓이 아니라 나의 현실 부정탓이라는 걸 깨닫는데 장장 반년이 걸렸다.


아무리 그가 화나서 홧김에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하더라도, 남편도 속으로는 자아성찰을 하고 미안하다는 마음을 느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 틀린 길로 가고 있다. 이혼이 틀린 길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혼을 안 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그가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은 잘못됐다고, 딱 그 말만 전해주고 싶다.




그가 나랑 사귄 지 이틀째에 사랑한다고 말한 표현이 그의 진짜 감정이 아니라 연인들의 행동을 마스킹했다는 사실이 지금의 나를 더 비참하게 한다. 그때 남편의 감정을 배려한다고 넘어가지 말고 웬 말이냐고 물어볼걸.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곧장 지웠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인가. 오, 이게 알아차림의 효과구나! 참회는 현실을 수용하고 나를 깨우치는데 도움이 된다.

현실을 받아들이니 비로소 내 현재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초라하고 병든 모습,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고 웃음도 사라진 지 오래. 꺼칠꺼칠한 피부에 목소리는 또 왜 이리 매가리 없는지. 근데 그것만 보이는 게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또렷하게 보인다. 좋은 길, 밝은 길, 새로운 가능성. 다친 내 마음을 치료할 방향성은 물론이고.




사귄 지 이틀째에 생뚱맞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뒤에도 물론 남편은 내게 종종 사랑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나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도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심지어 프러포즈하는 그가 울고, 받는 나는 안 울었다. 결혼 직전 우리 부모님과 같이 여행을 갔을 때도 저녁에 둘만 나와 잠깐 맥주 한잔 하면서 새로운 가족이랑 여행 오니깐 기분이 참 묘하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심부름 사건이 터지기 바로 전날에는 영화를 보더니 영화 주인공처럼 나중에 늙었을 때 아내가 먼저 죽으면 너 그리울 것 같아서 어떡하냐며 눈물을 흘린 사람이었다.


그 눈물 속에 분명 사랑이 담겨있었다. 근데 이제 나조차도 모르겠다. 뭐가 사랑인지, 그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 사랑들이 다 진짜이긴 했는지.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한 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사랑했으니깐 결혼했겠지. 그러나 그 사랑이 남들과 많이 다른 것뿐이겠지. 나는 여전히 남편이 사귄 지 이틀 만에 왜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는지, 그 사랑의 의미가 궁금하다.




둘이 만나서 사랑을 했는데 알고 보니 결국 짝사랑.

그게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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