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크만, 주방 (1936)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주방 - 생선과 크바피 (The Kitchen - Quappi with Fish)
- 작가 : 막스 베크만 (Max Beckmann)
- 제작시기 : 1936년
- 전시장소 :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관
베를린 분리파 멤버로 출발하여 독일 미술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지고 명성을 떨쳤으며, 표현주의에 발을 들여 판화 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는 듯한 날카롭고 컬러풀한 그림을 그린 막스 베크만. 탄탄대로일 것 같은 화가로서 그의 커리어에 중대한 전환점이 재앙처럼 다가왔다.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나치가 퇴폐예술이라 낙인찍고 탄압을 시작한 것이다.
약 20년간 미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며 존경받았지만 교수 자리도 잃게 되었다. 그림을 그려봤자 퇴폐미술이라 낙인찍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렇게 우울한 날을 보내던 1936년 어느 날, 베크만은 <주방>을 그렸다. 별다른 설명은 첨부되지 않았으나 부제를 "생선과 크바피(Quappi with Fish)"이라고 달았다. 크바피는 아내의 애칭. 베크만은 평소에도 크바피의 그림을 즐겨 그렸다.
작품 속에서 중앙에 서서 생선을 손질하는 여인이 크바피다. 그 옆에 앉아 과일을 깎는 사내가 누구인지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나 베크만 본인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뒤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요리가 한창이다. 부부가 한가로이 주방에서 식사를 차리는 광경이다.
그런데 구도가 오묘하다. 크바피는 대장부처럼 커다랗게 중앙에 서 있으며, 베크만 방향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채 가볍게 웃어준다. 베크만의 앉은키가 크바피에 허리 정도밖에 미치지 않는다. 사이즈로만 보면 엄마와 어린 아들이라 해도 될 과장되고 왜곡된 사이즈다. 베크만은 무겁고 우울한 표정으로 과일에 집중하고 있다.
교수 자리도 잃고 화가로서의 활동도 위축되어 사실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졌을뿐 아니라 평생 쌓아온 명성을 잃고 퇴폐적인 사회악으로 낙인찍힌 베크만은 몹시 위축되고 주눅 든 상태다. 쪼그라든 그의 자아는 어린이처럼 작은 크기로 우울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칼을 만지는 인물로 드러난다. 반면, 위축된 베크만을 다독이며 가정을 챙기는 크바피는 거인처럼 큰 크기에 온화한 표정으로 칼을 들어 먹을 것(생명력)을 만들어내는 인물로 드러난다.
모든 걸 놓고 싶은 벼랑 끝이지만, 베크만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대장부 같은, 거인 같은, 그러나 온화하고 위안이 되는, 그런 기둥 같은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힘든 시절을 버틸 수 있었을 게다. 이 작품이 나온 이듬해, 나치 정권은 기어이 "퇴폐화가"를 발표하여(물론 베크만도 포함되었다) 작품을 압수하고, 압수한 작품 일부를 "퇴폐미술 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그 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베크만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네덜란드로 떠나 그림을 게속 그렸다. 거기에도 나치의 마수가 드리우자 불편한 몸을 끌고 말년에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평생 쌓은 모든 것이 무너져도 버틸 수 있는 힘, 나이가 들고 몸은 불편해졌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힘. 가족이다. 우리는 모두 기둥 같은 아내에게 감사해야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