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보다 먼저 번지는 그 그림자
억울하다는 감정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하게 찾아온다. 소리치거나 폭발하지 않은 채, 아주 미세한 균열로 스며들어 마음의 바닥을 갈라놓는다. 어떤 날에는 그 균열이 아주 작게만 느껴지지만, 시간이 점차 지나며 그 금은 조금씩 넓어져 결국 내면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단지 의도 없이 흘러나온 추측이거나,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서 다가오는 공격을 모두 포함하여,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내 존재의 결을 비틀어놓을 때, 나는 그 왜곡된 그림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곤 했다.
억울함이란 그런 것이다. 진실이 왜곡되는 순간, 그 침묵이 내 안에 자리 잡는 감정. 분노가 불처럼 타오르는 대신, 마음의 가장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잿빛의 온도로 굳어버리는 그러한 감정.
처음에는 단순히 오해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이 되고, 풀려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진실보다 말의 속도가 더욱 빠르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말은 증식하고, 침묵은 왜곡되어 억울함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의 이야기는 이미 또 다른 사실처럼 굳어버린다. 그때부터 감정은 더더욱 밖으로 터지지 못하고 안쪽에서 돌처럼 굳기 시작한다. 불같은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결국 조용한 불씨, 억울함의 이름으로 불리는 무겁고 오래된 감정뿐이다. 불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태워 없애버리는 조용한 불씨인 것이다.
그 불이 내 안에서 얼마나 조용히 번져 나가는지를 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잔잔한 그 불씨는 조용히 타올라 나의 언어를 말려버린다. 감정은 식지 않지만, 말은 점점 사라진다. 억울함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 같다. 진실이 더 이상 말로 닿을 수 없을 때 침묵을 택하게 되고, 그 침묵 속에서 감정은 천천히 굳고, 굳어버린 감정은 다시금 무겁게 나를 끌어내린다.
점점 내가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의 오해로 만들어진 그림자가 내 얼굴을 덮고, 어느 순간 그 그림자가 나 자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을 그대로 품고 사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오히려 갉아먹는 행동이라는 것을. 억울함을 그대로 삼켜낸다는 것은 나를 잃는 일이다. 감정은 삼켜질 때 사라지지 않은 채 형태를 바꾸어 나를 잠식하려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유 없는 피로로, 혹은 알 수 없는 체념으로, 또 어떤 날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로 변하곤 한다. 그러니 나는 이제 이 감정을 꺼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에서 더 이상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서.
말을 꺼낸다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어렵다. 말을 잃은 사람은 결국 자신을 잃기에, 억울함을 침묵으로 견뎌낸다는 것은 인내가 아닌 포기이기에, 내 존재를 흐리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 누군가에게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그림자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최소한 저항을 해야 한다.
이 침묵을 깨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을 위해서. 내 안의 침묵을 아주 천천히 움직여, 묵묵히 쌓여 있던 시간들의 형태를 조금씩 바꿈으로써, 해방과 되찾음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비로소 조금씩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