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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pr 28. 2021

봄날은 간다

셋넷영화이야기58 : 행복


봄날 기억들로 뒤척이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다


‘봄날은 간다’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짙어지는 그리움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지태는 소리의 마음을 담아내고 소리의 풍경을 채집하는 엔지니어다. 대나무 숲에서, 바닷가에서, 겨울 산사 처마 밑에서, 수풀 우거진 들판에서 고요히 머물다 자신조차 소리의 또 다른 사연이 된다.


자연의 소리들에 취해 담담하게 미소 짓다 어느 날 풍경 속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녀 영애와 사랑에 빠지고 소리에 취해 흘리는 그녀의 콧노래를 담는다. 그러던 어느 느린 봄날, 바스락거리며 사랑이 깨지고 지태는 소리의 마음속으로 담담하게 돌아간다. 지태가 채집하는 소리들은 언제나 그대로이면서 항상 빠르게 변한다. 그가 영애와 나눴던 사랑의 마음 같았고 사랑의 풍경과 닮았다.


지태와 영애를 맺어준 인연의 고리는 라면이다. 라면은 3분이면 요리가 되는 패스트푸드다. 잠시 딴청 부리면 팅팅 불어 터져서 먹지 못하거나 맛이 없다. 그녀의 사랑의 방식이다. 뜨거운 면발을 집어 들면서 도무지 딴생각에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영애는 라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지태는 밥을 먹고 싶다. 할머니와 홀아버지와 심심풀이 화투 치는 외로운 고모의 성화도 한몫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족과의 밥상을 그리워한다.      


지태는 자고 있는 영애를 깨워 정성껏 준비한 밥과 북엇국을 권하지만 그녀는 외면한다. 그런 영애를 떠나보내며 지태가 묻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니? 내가 고작 라면으로 보여?’ ‘난 김치 담글 줄 몰라.’ 영애가 맞받아친다. ‘그딴 걸 왜 해야 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그녀는 속박을 거부한다. 그녀의 사랑은 가볍고 경쾌하다. 영애의 사랑은 엄마들의 희생 위에서 꽃피었던 수천 년 된 가족나무가 아니다.      


화사한 봄바람 같았던 영애와 헤어지고 난 뒤, 지태는 지나간 봄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그립다. 가슴이 사무치도록 그리워한다. 봄날은 그런 거다. 사랑도 그런 거겠지. 봄날은 가고 문득 다시 그리워지겠지. 

눈을 감으면 문득/그리운 날의 기억/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그건 아마 사람도/피고 지는 꽃처럼/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봄날은 가네 무심히도/꽃잎은 지네 바람에/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봄날은 간다 OST)     


셋넷은 길 위의 학교다.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여름밤 소낙비 같은 사랑들을 나눴다. 봄이 오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봄꽃보다 환한 얼굴로 잘 가라 인사한다. 봄날이 갈 때면 생각할수록 그리워지는 사랑들로 가슴 저린다. 살아보니 염려하던 것처럼 복잡하지 않았던 삶의 단순함을 어지럽힌 것들은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욕심과 미련과 회환이었다. 욕심이 쌓여 욕망이 되고, 욕망의 좌절들로 미련이 남고, 미련의 시간들은 어김없이 회환으로 뒤덮여 매번 봄날을 어지럽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휘청휘청 봄날은 가고 사람들은 무심하게 흐른다.
 


* 제목 사진 : 2012 통일 연습 한반도 청년 국제활동(일본 후쿠오카 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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