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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pr 21. 2021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셋넷영화이야기57 : 기억


이토록 아름다운 당신만이...


우리에게 익숙한 관계는 이해관계이고 은연중에 조건부 사랑을 당연하게 여긴다.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만들어지면 두 사람에게 향하던 처음 사랑은 자식과 주변으로 흩어진다. 직장에 얽매이고 권력에 순응하면서 상대와의 관계를 냉정하게 셈하고 치밀하게 가늠한다. 지속적인 생존에 걸맞게 헐겁고 속된 사랑을 가족을 위한 방패로 삼는다.      


님에게 그 강 건너지 말고 조금만 더 소풍처럼 추억하자던 아흔여덟 할아버지와 여든아홉 할머니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꿈결처럼 아름답다. 오직 당신만을 향한 사랑은 흐르는 강물이 되어 함께 흐른다. 알록달록 이쁜 내복을 구입해 두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흔적과 내복들을 태운다. 채 피어나지 못하고 죽어 가슴속에 묻었던 여린 자식들을 위해 준비했던 옷이다. 우리 애들에게 이쁘고 따뜻한 옷 챙겨 입혀달라고, 곧 당신 따라가겠다고 할머니는 혼잣말을 건넨다. 머릿속 기억은 이내 희미해지지만 가슴에 품은 기억들은 서늘하도록 생생하다.


70년 넘도록 살며 열두 명의 자녀를 낳고 오래도록 지켜본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두 사람 존재만이 보이고 그 외의 것들은 보이지 않을 때, 보여도 하찮게 여겨질 때 가능한 관계가 아닐까? 그럼에도 일상의 하찮은 것들이 때때로 관계를 비틀고 힘겹게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생일상을 받는다. 시끌벅적 잔치를 벌이지만 끝은 우울하다. 막내딸이 큰 오빠에게 서운함을 숨기지 않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장남은 판을 깬다. 할머니는 죄인처럼 눈물을 쏟고 할아버지는 먼 곳을 바라만 본다. 할아버지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고슴도치 자식들은 오열한다.      


남편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쏟는 할머니의 미련은 무엇일까? 마당에 쏟아진 낙엽을 치우다 말고 낙엽을 뿌리며 장난치던 그이와, 집 텃밭에 핀 꽃을 꺾어 머리를 치장하고 이쁘다며 한참을 바라보던 그이와, 개울가 빨래터에서 물장난을 하며 시시덕거리던 그이가, 기억의 저편에서 와락 달려 나와 할머니의 온몸을 촉촉이 적신다. 기억들,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기억이 눈물이 된다. 돈과 권세와 명예로움 따위는 감히 얼씬도 못했을 가슴속에는 당신만이 가득했을 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슴속 기억들은 질기고 서럽다. 


셋넷에는 나이 어린 할머니들이 많다. 청춘의 모습으로 씩씩한 척 딴청을 부리며 할머니의 가슴을 숨기고 위태롭게 살아간다. 셋넷들 가슴속에 꾸깃꾸깃 감추어둔 기억들이 어쩌다 눈물이 되어 기억 속 빈자리를 적시곤 한다. 강을 건너버린 저 세상 아빠의 기억도 있고, 애끓는 그리움으로만 닿을 수밖에 없는 엄마의 기억도 있다. 강을 건넜는지 안 건넜는지도 모른 채 희미해져 가는 절대 사랑의 간절함으로, 이방인들의 낯선 봄밤은 올해도 하얗게 뒤척인다.  



* 제목 사진 : 5차 한반도 평화원정대(2018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 중 앙코르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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