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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Dec 17. 2020

다우트

셋넷 영화이야기 39 : 의심과 소문


사랑하는 건 아무 잘못이 없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듬해 가을, 소도시의 성당에서 미사가 열린다. 신부는 살면서 확신이 없을 때 어찌해야 하냐고 설교한다. 사랑하는 이들과 막막한 절망을 어찌 나눠야 하냐고 묻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건 슬픔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때, 미사에 참석한 수녀가 졸고 딴짓하는 아이들을 단호하게 응징한다. 아이들은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는 중학생들이고 수녀는 교장이다.      


교장은 단호하다. 종교 교리에 입각하여 수녀인 교사와 학생들과의 접촉을 금지한다. 교사와 학생 간의 구분은 엄격하고 복종은 절대적이다. 침묵과 처벌은 그녀 권위의 상징이다. 복장과 행동은 규정대로 단정해야 하고 볼펜 사용은 금지한다. 감각을 자극하는 단맛을 멀리하게 하고 세속의 음악은 불허한다. 교장 수녀는 학교 운영의 중심이고 규율은 교장 수녀에게서 비롯된다.     

 

다른 교구에서 옮겨와 미사를 집전하고 아이들을 상담하는 신부는 교장 수녀가 금과옥조처럼 지켜온 중심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고 그녀가 세운 표준을 수시로 넘나 든다.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다가가 재밌는 말과 행동으로 편안하게 해 준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커피에 설탕을 넣어서 먹고 세상의 즐거운 음악도 마다하지 않는다. 삐딱한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꼭 안아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왕따가 되어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유일한 흑인 학생은 이 학교에서도 외롭다. 아빠는 폭력으로 지배하고 엄마는 대학 진학으로 신분 상승만 바라며 모든 문제를 외면한다. 미사 의식을 돕는 복사가 되어 몰래 미사주를 마시다 들켰지만 신부는 감싸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담임교사와 교장의 의심을 산다. 규율과 규칙에 갇힌 두 수녀의 의심은 신부의 설교 메시지처럼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고 지속적인 결속력을 갖게 된다.    

  

관심과 사랑은 엄격한 종교 교리 때문에 용납 못할 불경스러움이 된다.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취향은 이분법적인 도덕 때문에 감춰야 할 죄가 된다. 다정함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정당한 의심은 낯선 것들을 배제하는 힘 있는 자의 지배방식이 된다. 의심은 중심과 표준을 거역하는 이질적인 것들을 제거하려는 불통의 전략이 된다. 여린 자비심은 인간적인 약점이 되고 만다.     


영화처럼 셋넷학교의 소통방식은 세상의 온갖 의심으로 어지러웠다. 셋넷의 배움은 바람에 날리는 베갯속 깃털처럼 소문으로 떠다니며 회자되었다. 남녀 학생들이 자기답게 화장하고, 당당하게 머리를 물들이고,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귀걸이를 하고, 교사들과 술을 마시며 고민을 털어놓고, 친구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노래방에서 거리낌 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풍경들이 확고한 의심이 되고 강력한 억측이 되어 지속적인 소문들로 울타리를 견고하게 쳤다. 사랑하는 건 아무 잘못이 없다. 


숨 쉬면서 의심을 만들고 기도로 강력한 결속을 다지는 그들은 사랑보다 종교 교리가 중요하다. 그들의 의심에는 온전한 사람이 살지 못한다. 중심과 구분과 표준과 관습으로 인정받은 생기 없는 인간들이 질서 정연하게 서식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저들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나뉘지도 않는다. 복잡하게 얽히고 대립하고 오해하고 변화무쌍하다. 도덕과 규율에 사로잡힌 의심들이 병적인 확신으로 비열한 결속력을 갖는 까닭이다. '인간으로 사는 것에 지친다.(네루다)'    


온갖 수상한 의심들로 도배되었던 한반도의 2020년이 저문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당파로 갈라지고, 지역으로 갈라지고, 헛된 권력을 탐하느라 깃털만큼의 자비로움도 사라진다. 무자비한 의심들로 한 해가 쓸쓸하게 파묻힌다. 자기 안에 있는 수많은 의심들을 참회하는 세상의 수녀 교장들이 보이지 않는 세모(歲暮)의 시절은 가슴 시리다. 셋넷의 길잡이인 나는 신부인가 수녀 교장인가. 내 안에는 수녀 교장도 있고 신부도 살고 있다. 



* 제목 사진 : 2015 통독 25주년 기념 독일 초청공연(원주, 드레스덴,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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