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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an 08. 2024

힘들어도 내 하루가 좋은 까닭은

자율성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선택을 살펴보면 된다. 자주 웃고 내가 좋다며 자기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사람이어서 나도 마음과 시간을 내어주었지만, 정작 내가 축하받을 상황에 한 번도 축하해주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요즘 친구들답게 참 깍쟁이구나 싶었는데 내가 힘들 때 먼저 내 책상에 커피와 메모를 남겨주던 후배도 있었다. 말은 늘 행동보다 쉽다. 그 사람의 선택과 그에 따른 행동은 그 사람을 더 확실히 알려준다. 어느 날부터 나는 사람의 말보다는 그 사람의 행동과 선택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나를 파악할 때도 마찬가지라 여긴다. 내가 다짐하는 것들, 내가 나를 설명하는 말들은 나를 감추는 포장지인 경우가 있다. 내가 세웠던 계획들이 다 행동으로 이어지고, 내가 맺었던 나와의 약속이 다 선택되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결국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해왔는지를 샅샅이 살펴야 내가 보인다.           



  다행인 건 마흔이 되니 내가 해왔던 선택들이 꽤 쌓였다. 나는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설명하는 것은 잘한다고, 그래서 앞으로도 잘할 거라는 설명하는 능력에 대한 효능 신념이 있다. 이 신념은 강의 제안이 들어올 때 대게 수락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웠을 때 뿌듯함을 느끼는 나를 좋아한다. 자연스레 배움은 삶에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고 배움이 가져오는 불편한 과정을 흘겨보지만은 않으려 노력한다. 불안정 회피애착을 가진 나는 낯가림이 여전해서 여럿이 모인 자리에 말과 시선을 잃어버린다. 4명 이상 모임엔 잘 나가지 않지만 대신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괜찮다. 대인관계 에너지 용량이 적어서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지만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열광적이다. 내 과거의 경험 한 방울씩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 경험과 선택들이 만든 한 방울들은 나를 설명하는 레퍼런스가 되어 지금의 선택에 근거가 되어준다.         


  

  하지만 날씨는 한 번도 같았던 적이 없어서 오늘의 선택 앞에서 나는 매번 주저한다. 과거의 선택은 과거의 상황에 이루어진 것이니까. 지금의 선택은 늘 낯설고 새것이어서 레퍼런스에 기대면서도 선택 앞에 주저하기 일쑤다. 오늘의 상황에서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더욱 아찔한 것은 변한 것에는 나도 포함이다. 나는 더 이상 내 공부만 하면 되던 10대도, 직장에서 야근을 할 때 고려할 건 저녁을 뭐 먹지 밖에 없고, 퇴근하면 온 방에 논문을 널어두고 밤새 논문만 쓰면 되었으며, 엄마가 이모들과 김장을 할 때 아무렇지 않게 친구를 만나러 가던 20대 시절의 내가 아니다.



  마흔의 나는 내 공부를 할 때 옆에서 자신의 숙제를 하겠다는 아홉 살과 같은 책상에 앉는다. 내 공부에 집중하다 보면 아홉 살의 부스럭거림에 ‘주윤! 엄마 바쁘니까 조용히 해. 네 공부 어서 해.’ 하는 날 선 한 마디를 내뱉고는 서로 서운해하는 저녁이 잦다. 엄마가 김장을 한다는 연락을 받으면 눈치가 보인다. 용돈이라도 드려야지 싶고 내년에는 가보리라 다짐하면서도 마음이 일렁인다.           



  지금의 나는 나, 가정, 직장이라는 세 꼭짓점을 가진 삼각형 위에 서 있다. 이 삼각형은 고정된 다리가 없다. 삼각형의 밑부분은 반구모양의 짐볼이어서 그 위에 올라서는 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균형을 잡는 일이다. 나는 균형을 잡기 위해 두 팔을 양 옆으로 뻗어 파닥이고 두 발은 힘을 잔뜩 주느라 내 다리는 자주 덜덜 떨린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경험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어느 꼭짓점으로도 더 갈 수 없다.           


  집에서 나는 아내이자 엄마이다. 할 수 있는 음식은 다섯 손가락 안에 다 꼽을 수 있을 만큼 미니멀한 레퍼토리를 가진 엄마이지만 서툰 숟가락을 들고 부엌에 자주 선다. 저녁 식사 시간 동안 퇴근한 남편과 나의 하루를 나누고 농담을 하는 잔잔한 기쁨을 나눈다. 그 시간은 자주 아홉 살의 숙제를 봐주는 시간으로 페이드아웃되곤 한다. 주중엔 이러려고 면허를 땄나 싶을 정도로 아이의 학교와 학원 라이딩을 하고 간식을 마련한다. 상담이나 공개수업 같은 학교 행사가 있으면 열일 제쳐두고 도로의 무법자가 되어도 학교에 참여해야 하는 것도 엄마로서의 내 몫이다. 불금을 자축하며 맥주에 새우깡을 먹고 늦게 잤다더라도 주말 아침에 방긋 웃는 아이의 아침을 마련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빨래를 하는 것은 확고한 주말 루틴이다.       


    

  동시에 나는 수업자료를 검토하고 만들어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업인이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제대로 배워야 하기에 자료 검색,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수업자료 만드는 일에 공을 들인다. 교사와 학생은 공부를 하러 모인 사람들인데 교사는 공부를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생각인 이론을 제대로 전달해 주는 것도, 학생들에게 과거의 생각인 이론을 도구 삼아 현재에 적용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도 내 몫이라고 여긴다. 내가 정확하게 이론을 설명해야 학생들이 이론을 자신의 필터로 거르는 글과 이미지를 잘 산출해 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놓치고 싶지 않은 한 가지 역할을 위해서도 애를 쓴다. 바로 가끔 엄마, 아내, 교사 역할을 떠나서 누군가의 친구 김주윤으로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다. 자타공인 친구 없는 사람인 나는 얼마 없는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려고 한다. 다들 나만큼의 역할들이 있다 보니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아침 9시에 만나는 모임도 있고, 아이가 학원 간 사이 단 1시간 30분을 겨우 맞춰 차를 마시기도 한다. 그 중요한 약속을 위해 건강검진을 할 때 비수면 위내시경도 불사한다. 친구랑 만나 놀아야하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비집고 들어가 만든 만남에서 나와 친구들은 시시한 농담만이 가득한 시간을 보낸다. 마음에 웃음이 비추는 시간이다. 일상 속 시시콜콜한 농담들이 오가는 시간을 위해 각자의 소중한 오늘의 한 조각들이 모인 시간은 소중하다. 완전히 비생산적인 대화는 단비가 되어 내 일상의 토양이 촉촉하게 부풀어 오름을 느낀다.          



  나는 오늘도 나 자신, 가정, 직장이라는 삼각형 위에 서서 무게중심을 잡으려고 다리에 힘을 꽉 쥐고 두 다리는 덜덜 떨고 있다. 재밌는 건 그런 내가 나는 참 좋아서 오늘도 내일도 삼각형 위에 내 발로 올라가기로 한다.



  도로의 흐름을 바꿔가며 서둘러 운전을 하러 가면 내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좋다. 눈치 보며 휴가를 내어 아이 수업을 보러 가는 건 나의 기쁨이다. 반찬가게에서 산 반찬과 국에 감탄하며 나를 칭찬할 때 “사 온 거야!”하고 말하면서도 나는 재미있다. 잘 가르치기 위해 많이 배우는 과정을 나는 좋아한다. 내가 또 새로운 것을 알았구나 하는 유능성이 채워지는 듯하다. 쪽시간을 내어 만나는 만남에서 나는 관계에 대한 욕구를 충족받는다. 이 세 가지를 하느라 다리는 덜덜 떨려도 나는 이 아슬아슬한 균형 잡기에서 기쁨과 유능함, 관계의 만족을 느낀다. 왜? 내 선택들이니까. 적어도 내가 키를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Ryan과 Deci는 내 삶에 키를 내가 쥐고 있다고 여기는 자율성과 내가 가진 능력을 최적으로 수행하여 환경과 효율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유능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친밀함과 유대감으로 채워지는 관계성은 인간의 기본 심리욕구라고 설명했다. 자율성과 유능성, 관계성이 충족된 사람은 삶을 즐기는 내적 동기를 경험하게 되는데 자연스레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자주 느끼는 사람이 된다. 그중에서도 내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 과정에서 자유 의지에 따라 조절하는 자율성 욕구가 채워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나 자신, 가정, 직장에는 내 선택들이 있다. 시작은 내 선택이 아니었더라도 직장 안에서 내 선택으로 컨트롤되는 부분이 있다. 내가 내 아이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 선택으로 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었고, 유치원을 보냈고, 아이가 좋아하는 시래기 된장국을 끓일 수 있다. 나 자신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이 많지만, 선택했으면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본 내가 있다. 그러면 그 선택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좋았던 선택이 된다.           


  나는 괜찮을 삶을 위해 선택하고, 그 선택을 다듬고 만들며 살아간다. 그렇게 내 삶의 윤곽을 만들며 산다. 다만 바란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책임지기를. 내 선택이 내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는 쪽을 향해 가면서 좋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기를.



  그런 삶은 현재에 발을 딛고 서서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참 괜찮았지 하며 내 삶을 설명하고, 현재의 선택에 힘을 더해주어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낙관을 손에 쥐어준다. 웅장하고 거창하지 않은 삶이어도 괜찮다. 물질과 시간 앞에 여유가 조금 덜해도 괜찮다. 내가 만든 내 삶의 윤곽이 내 마음에 들 때 내 손에 낙관이 쥐어진다. 그렇게 오늘을 잘 살며 내일의 맑은 나를 기대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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