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배시시 웃으며 남편에게 쓱 던졌다. 농담을 솔솔 뿌려 건넨 문장에 남편은 간질거린다며 도망쳤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을 좋아한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고도 나는 그랬다. 눈으로 들어왔다가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 문장을 그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마음. 우리는 다행히 와인을 한 잔 하고 있었고, 늦여름 초저녁 밤이었고, 가을을 담은 마른바람은 늦여름의 보드라운 습도를 담고 불어오고 있었다.
좋은 것은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 늦여름의 초저녁에 나는 박준 시인의 문장을 그에게 낭독해 주었다. 시인의 문장에 빠진 나는 좋아했고, 부엌에서 거실로 나와 일상의 손으로 휴대폰을 보던 그는 흠칫 놀란 눈치였다. 나의 말랑말랑한 마음을 적절히 토스해 주는 그의 가벼운 응답이 좋았다.
겨울의 어느 일요일, 남편은 소파 옆 테이블에 올려진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몇 장을 읽더니 가벼운 데일리 와인을 셀러에서 빼와서는 한 잔을 마시며 읽기 시작했다. 자줏빛 와인이 투명하고 둥근 와인 잔 안에서 스왈링되는 속도만큼 겨울의 초저녁은 조용하고 천천히 내렸다.
"부인, 왠지 이 시인은 가을에 태어났을 것 같아!"
"부인, 이 정서! 어떻게 해? 이 시인도 제주와 남해를 좋아하네."
"부인 우리랑 비슷한 또래 아닐까?"
정작 이 책을 집어든 그는 남해와 제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자신의 정서와 닮았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그의 호들갑에 화답하며 핸드폰을 들어 박준 시인을 검색했다.
"남편! 우리랑 나이가 같아. 우리 친구네!"
"남편! 박준 시인도 10월 생이야. 오~남편이랑 태어난 달이 같아!"
갑자기 박준 시인은 우리의 친구가 되었고, 그의 허락도 없이 우리는 시인 친구를 얻어버렸다. 이때만큼은 금강 하류의 남부 지역에 사는 83년생 남편과 세련된 수도 서울 남자인 박준 시인과 물리적 거리 따위 없었다. 남편은 이미 박준 시인의 문장과 와인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남편, 박준 시인은 와인 안 마시던데. 막걸리 마시던데."
남편의 감성을 바사삭 깨 보려는 나의 농담 따위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자연스러운 문장이었어.
네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칠만 원을 줄게. 너는 오만 원만 내. 그러면 십이만 원이 되잖아. 우리 이 돈으로 기름 가득 넣고 삼척에 다녀오는 거야. 네가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와, 이 정서! “
내가 건네었던 그 문장이 담긴 페이지를 읽었나 보다. 와인 한잔에 시인의 마음이 한껏 웃자란 그는 내가 그랬듯이 시인의 문장을 내게 낭독해 주었다. 눈으로 들어와 마음에 담긴 문장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감출 수 없는 게 맞나 보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제 노트에 남기고, 누군가는 SNS에 남기고, 누군가는 낭독을 해준다.
시인의 마음이 웃자란 그를 보니 웃음이 났다. 간질거린다며 도망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온 마음에 시인의 문장이 가득한 그가 순진한 스펀지 같았다. 어린아이 같은 그의 감탄에 나는 지금의 마음으로 화답했다.
"남편, 네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5만 원을 줄게. 네가 50만 원 내.
내가 반짝이는 거 좋아하잖아. 너는 나 좋아하고."
연말에 팔찌를 살까, 반지를 살까, 귀걸이를 살까를 가지고 며칠을 고민하던 나였다. 매일 변하는 나의 위시리스트를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건 어떨까? 이건 어때? 하며 호들갑을 떨던 연말의 나를 남편의 감동에 겹쳐 보여주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시인의 마음에 충만했던 그에게 현실의 반짝임을 스윽 내밀었다. 나의 번화한 말에 남편이 가진 시인의 웃자란 마음은 어질어질해졌다.
시인이 남긴 서정의 문장들은 우리의 사소한 기억에 남았다.
"남편 내 아침 커피 어딨어? 나 커피 좋아하잖아. 넌 나 좋아하고."
"언니, 우리 봄에 여수로 캠핑가자. 형부는 여수 좋아하잖아. 언니는 형부 좋아하고."
우리는 자주 시인의 문장을 읊으며 걸었고, 집으로 들어오는 문을 열었고, 와인을 마셨고, 웃었다.
좋아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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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문장에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