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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Sep 30. 2022

아름다운 너와 나의 순간

  가볍고 마른 가을바람이 찾아온 구월 이른 저녁, 여느 때처럼 학원을 끝낸 여덟 살의 픽업을 위해 학원 건물 주차장에 도착했다. 늘 시간에 맞추어 오는 습관은 주변을 살필 여력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의 1여 년 동안 매주 1회 수요일마다 급히 주차장에 들어와 주차 자리를 찾아 몇 바퀴쯤 지하 주차장을 돌고 나서야 겨우 주차를 하고 곧장 4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런데 오늘, 행운이 따랐는지 지상주차장에 자리가 남아 있다. ‘오! 행운인데!’ 나는 산뜻하게 주차를 하고 운전석의 차 문을 열고 나오는데 묵직한 차 문이 열리자 가볍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함께 열린다. 그리고 건물 1층에 솥밥 집이 눈에 쏙 들어왔다.        


   

  가끔 늘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볼록렌즈를 가져다 댄 듯 갑자기 쑥 튀어나와 눈에 맺히는 것이 있다. 이런 게 무의식의 반영일까? 환절기인 요즘이라 몸이 적응하는데 온 에너지를 집중하는 때여서 그런지 요즘 유난히 저녁식사 준비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일에도 꽤나 지쳤었다. 심지어 어떤 날은 설거지를 하며 나도 모르게 ‘지겨워. 지겹다.’하고 생각하던 저녁도 있었다. 그 생각에 흠칫 놀라며 생각을 가다듬던 초가을의 저녁식사 준비를 앞둔 시점에 눈에 쏙 맺힌 솥밥 집은 어쩌면 내 무의식이 똑똑 노크를 하는 순간이 맞다. 그렇다면 또 흔쾌히 손 잡아 주어야지.           



  ‘오늘 저녁, 솥밥으로 간단히 해결해볼까?’ 하는 선선한 생각이 들자, 빼곡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저녁 시간들 사이의 빈틈에 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넘나 든다. 이미 내 마음과 코에도 솥밥의 뜨뜻한 기운이 함께 와닿는다. 학원이 끝나면 언제나 곧장 집으로 오기만 했던 우리는 가을 저녁 별안간 둘만의 외식에 나섰다.           


  나는 꼬막 솥밥을 주문했고, 여덟 살은 스테이크 솥밥을 주문했다. 번화한 상업지구에 위치한 가게 안은 저녁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과 퇴근 후 서로의 하루를 위로하며 근황을 나누는 친구들이 모인 테이블로 가득했다. 엄마와 여덟 살 아들, 이렇게 둘이 앉은 테이블은 이 가게의 여러 테이블과는 다른 공기를 자아냈다. 나와 여덟 살은 나란히 앉았다.      



  “오늘 학원은 어땠어?”

  “굿”

학원이 어땠는지, 학교가 어땠는지 묻는 물음에 여덟 살은 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는 한 단어로 말한다. 오늘도 나의 여덟 살은 여전히, 한결같이 그렇게 말한다. 짧은 단어와 함께 나를 살짝 안아주었다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와있다. 선선한 가을 저녁이지만 에어컨이 켜져 있어 서늘한 기운이 여덟 살의 작은 엉덩이 덕분에 따듯해진다. 어쩌면 나의 ‘어땠어’와 여덟 살의 ‘굿’은 언제나 다행스러운 의미인 ‘잘 다녀왔지요’를 담고 있는 하나의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석처럼 찰싹 붙어있는 단어를 주고받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사실 아직 단 둘이 외식을 하는 것이 나는 걱정스럽다. 나의 여덟 살은 원래 음식에 대한 즐거움과 식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편식이 있는 편이다. 게다가 낯선 재료와 소스들로 요리된 음식은 씹는 것을 거북해한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외식을 하자고 해도 낯선 재료를 만날 것에 대한 부담감인지 늘 집에서 먹고 싶다고 하곤 했다. 나는 행여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안 먹겠다고 하지는 않을지, 먹는 데에 도통 관심이 없어서 여덟 살만큼 컸는데도 내가 숟가락을 들어 여덟 살의 입에 밥을 넣어줘야 하는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지 우려가 되었다. 더욱이 식당을 돌아다닌다고 하지는 않을까 한번 더 걱정을 더했다.



  “와! 스테이크 솥밥 나왔다! 맛있겠다! 우와! 이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건가 봐. 우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게, 그리고 여덟 살의 숟가락이 잘 움직였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나는 더 호들갑을 떨며 밥을 비벼주었다.            



  맙소사! 나의 여덟 . 많이 컸다. 밥을 쓱쓱 비벼서 스테이크 한점 올려먹기도 하고, 스테이크를 젓가락으로 집어 따로 먹기도 한다. 따듯한 밥을 숟가락 하나 가득 퍼서 김치를 얹어먹기도 한다.

  “어때?”

  “엄마! 진짜 맛있어요!”



  혼자서 숟가락을 집어서 밥을 한 숟가락 가득 퍼올리는 그 손가락의 야무짐이, 오물조물 씹어먹는 그 올망졸망한 입이, 그리고 밥이 담겨 풍선처럼 부푼 그 야무진 볼이 너무나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대견함에는 이상한 감정이 함께 딸려왔다.           



  제 손으로 밥을 먹는 그 자율적인 여덟 살의 행동들은 참 자연스러워서 이제 내 손이 들어갈 곳이 없는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내 여덟 살에게 툭 떨어져 나온 것만 같았다. 홀가분하지도, 단순한 서운함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 해내는 여덟 살이 대견하면서도 여덟 살과 분리된 내가 마치 길을 잃은 아이 같았다. 내가 때론 귀찮아하고 수선스럽게 굴어야 했던 일이 증발해버린 느낌. 난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어쩌면 나의 여덟 살이 내 품을 빠져나와 두 발로 스스로 걸었을 때, 유치원 버스를 혼자 타고 갔던 아침, 학교에 입학하던 삼월의 어느 아침에도 나는 그랬었다. 여덟 살의 커져가는 자율성 앞에 나는 늘 길 잃은 아이처럼 당황해했다. 기쁘고 대견하면서도 나는 홀가분해하기보다는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거렸다.   


        

  그렇게 몇 번의 서성거림을 지나면 새로운 미션들이 내게 주어졌다. 두 발로 스스로 걷자 우리는 놀이터에 가서 미끄럼을 탔고 산책을 했다. 나는 미끄럼을 타는 아이를 잡아주고, 신나게 미끄러져오는 아이를 기다리며 두 팔 벌려 웃어주었다. 유치원과 학교에 혼자 다니고부터는 숙제를 봐주고 라이딩을 해주는 일이 내 몫이 되었다. 가끔 숙제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혼내는 일도, 그러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며 후회하는 날들도 진행 중이다. 하교 길에 그네를 밀어주는 일도 아직 내가 할 일이다. 아무리 오를 때 다리를 쭉 펴고, 내려올 때 다리를 접으라고 말해주어도 아직 여덟 살은 그네가 서툴다. 자주 나에게 그네를 밀어달라고 부탁한다. 앉아있고 싶은 나는 어떻게든 혼자 해보게 하지만 별 수 없다. 결국 몇 번 밀어주고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난 안다. 언젠가 내 여덟 살의 그네는 늘 그랬듯이 내 손 없이도 쭉 저 높은 곳까지 부드럽게 밀고 올라가고 또 내려올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마 그때 나는 여덟 살이 두 발을 힘껏 굴려서 저 높이 올린 그네의 뒷모습을 보며 내 두 손은 또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릴 것이다.           



  이제 우린 각자 밥을 먹는다. 더 이상 한 그릇을 주문해서 나눠 먹는 사이가 아니다. 너와 나는 각자 기호에 따라 메뉴를 선택했고 각자의 숟가락이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움직인다. 언제쯤 제 손으로 밥을 먹을까 하며 여덟 살의 입에 숟가락을 넣어주던 푸념은 이제 갈 곳을 잃었다.        


  

  푸념이 떠난 자리에 한 가지 생각이 담긴다. 그렇게 푸념하는 시절, 아이가 어릴 때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어쩌면 지금이 우리 둘의 삶에서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는 생각. 둘이 손 잡고 같이 등교하고, 학교와 학원을 데려다주고, 아이 밥을 지어주고 아이의 그릇을 설거지하고 입고 온 옷을 빨래하는 일,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나의 주말 계획엔 언제나 네가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지금이 어쩌면 내 삶에 가장 다복하고 행복한 시절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니 이 행복한 소란이 가득한 지금에 충실히 감사해보자 싶다. 식사를 준비하며 오늘도 ‘엄마의 기쁨이야.’하고 말해보고,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학교 가는 아이에게

“오늘도 즐겁고 안전한 하루 보내!”하고 뒤에서 명랑하게 말해주어야지. 내 여덟 살은 또 아무 말 없이 싱긋 웃거나 스윽 지나가겠지만 그래도 나의 기쁨을 내가 진심으로 표현하며 지금의 행복을 누려야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선선하고 맑은 가을 저녁 바람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차의 창문을 열었다. 여덟 살은 BTS, 나는 김동률을 사이좋게 번갈아 들었다. 이 저녁, 두 개의 각자 아름다운 두 문화가 콤팩트한 차 안을 가득 채운다. 그 사이를 어슴푸레한 가을 저녁의 공기가 넘나들며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을 자아낸다.           


  어떤 순간은 그날의 공기까지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나는 오늘이 그런 날임을 직감하고 있다. 나와 여덟 살이 가진 가을 저녁의 수요 미식회. 너에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많은 하루 중 보통의 어떤 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오늘 저녁 행복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의 행복을 손에 꽉 쥐었다. 이 마음으로 다음 주의 수요 미식회도 함께해보자.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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