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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l 29. 2023

꽃밭과 꽃접시의 하이파이브

  일상은 늘 같은데도 늘 긴장하게 만드는 기묘한 능력이 있는 듯하다. 아니, 확실히 있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출근, 일, 스케줄이라는 녀석들.



  요 녀석들이 내게 이렇게 힘이 센 이유는 아마도 요 녀석들은 깍쟁이처럼 늘 같은 속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루마다 떨어지는 체력으로 내 속도는 느려지는데 말이다. 그 녀석들의 열차에 탑승해야 하는 나는 어쩔 수 있나. 나의 연료를 태워 그 열차에 나를 태워야지.



  한창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를 태우다 보면 서서히 내면의 내 땅은 건조함에 갈라진다. 참 슬픈 건, 마음은 말라가는 데 몸은 부풀어 오른다. 내면의 건조함을 달랜다고 맥주를 좀 마셨을 뿐인데 내 몸도 융통성 없이 어제의 맥주를 내 몸에 남긴다. 물론 맥주만 마시면 심심하니 과자를 좀 먹었고, 좀 서운하니 사발면 하나 먹긴 했다. 여전히 긴장의 아침을 데리고 오면서 어제의 과식까지 같이 오는 건 좀 언페어 아닌가. 봐주는 게 없는 이 깍쟁이 같은 삶!



  그래도 삶은 단면이 아닌 양면이어서 가끔 피식-하며 익숙한 일상에 가볍고 간질간질한 틈을 열어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삶은 밀당의 고수이다. 다만, 이 순간은 찰나여서 밝은 눈과 쫑긋한 귀로 잡아채야 한다. 나는 이 순간을 참말로 진심으로 아이돌 팬클럽 수준으로 좋아한다. 피식-하는 순간, 마치 마른땅에 물을 주듯 내 얼굴에 물기 한 방울이 퍼트려진다. 화-해지는 그 순간. 내 마음은 물을 준 화분이 된다.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러나. 다 내 행복을 위해서지.’

여느 때처럼 분주한 아침, 불현듯 빛보다 빠르게 떠오른 이 생각은 급한 내 마음과 두 다리보다 강하고 빨랐다. 나는 현관으로 향하던 발을 멈춰 세우고 돌아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곤 노란 포스트잇과 볼펜을 쥐었다.



  “내 사랑 주윤! 통에 샤인머스켓이랑 삶은 달걀 2개, 우유 간식 먹어요!”

  엄마가 없는 집에 혼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아홉 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이것이었다. 노랑 쪽지 한 장. 엄마가 지금은 책가방 무겁게 메고 온 너를 두 팔 벌려 맞아줄 수는 없지만, 엄마는 네 수고를 알고 있단다. 널 위해 준비한 엄마의 마음까지 함께 먹으며 배도 마음도 부른 오후가 되길!



  한 글자씩 써 내려갈 때마다 내 마음에 꽃이 피어났다. 하트를 안 그릴 수가 없다. 하트를 그리고 그림도 그리는 데 이미 내 마음은 아지랑이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봄의 꽃밭이 되어있었다.



  나는 아침이라는 깍쟁이가 정해둔 속도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고 잠시 내 속도로 갈아탔다. pause. 잠깐! 하고 손을 번쩍 들고 소리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리고 1분이 채 안된 내 시간을 정상참작 했는지 오늘 아침은 뭐 그쯤은 별거 아니라며 지나갔다.



  깍쟁이인 줄 알았는데 또 내 목소리는 들어주네. 칫, 짜식! 하고 피식 한번 웃는다. 아무래도 밀당의 고수인 오늘에게 또 말린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어차피 한 배를 탄 운명인데. 서로 도우며 사는 거지.



  꽃밭을 마음에 품고 직장으로 가는 길은 늘 떠밀려가던 다른 날과는 달랐다. 아침이 이럴 수도 있구나. 내 밭에 고랑을 파주는 일을 내가 했구나. 그 일이라곤 내 마음을 전하는 일. 손바닥만 하더라도. 그리고 채 1분이 안되더라도. 이런 1분들이, 이런 작은 삶의 조각들이 내 삶 이곳저곳에 잔잔히 자리 잡아 은은한 빛을 내어준다. 그 후광이 있어 가끔 찾아오는 내 성과가 더 안온하게 빛이 나고, 매일의 지난함이 위로받는다.



  


  “엄마!”

집으로 돌아온 나를 제 방에서 큰 소리로 맞아주는 주윤. 내가 집에 온 게 맞다.

  “주윤! 간식 먹었어?”

  “네!”

제 방에서 병 세우기 놀이에 탐닉한 아홉 살은 목소리만 들린다. 짜식. 여전히 귀여운 목소리에 내 귀도 간질간질하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아홉 살이 먹은 간식의 흔적이 보인다. 멸균우유 팩, 크래커 상자, 빈 통. 녀석. 언제쯤 먹고 치우려나~하던 사이 낯선 푸른 꽃무늬가 담긴 아름다운 접시가 눈에 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저 낯설고 아름다운 꽃 접시 바야흐로 결혼 전, 한창 티(tea)에 꽂혀있던 전생의 내가 고이고이 사두었던 티잔 세트의 소서 아닌가! 저걸 어디서 찾았지? 고이고이 아껴두었던 그 소서!



  “주윤! 이 접시는 어디서 꺼냈어?”

  “아~그거요? 달걀 먹는 데 소금 놓을 그릇이 없길래 꺼냈어요.”



  맙소사. 이 아홉 살은 우아하기도 해라! 엄마 아빠는 어떻게든 설거지 줄이려고 모든 반찬을 한 접시에 담으며 사는데! 그럼 그럼. 달걀 소금은 우아하게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푸른 꽃이 담긴 그릇에 찍어먹어야 제 맛이지!



  나는 이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아홉 살이 의자를 끌어가다 찬장을 열고는 그 위에 담긴 티잔을 고이 옆으로 치우고 받침 소서를 꺼냈을 장면도 상상해 보고, 그라인더로 소금을 갈아서 그 접시에 놓았을 장면도 상상해 보았다. 어떻게! 소금에서 꽃향기는 났니?



  내 마음에 꽃 한송이 피워내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삶의 속도에서 잠시 내려와 잠깐!을 외치며 중심추를 내게 가져오는 시간 1분. 손바닥만한 공간이면 충분했다. 그 덕에 내 마음에 꽃밭이 생겼다 좋아했더니, 아홉 살도 꽃접시를 찾아 우아한 간식 시간을 음미했구나! 꽃밭과 꽃접시의 하이파이브 덕분에 오늘 내 마음에 또 흠뻑 물이 적신다. 내 마음에 물을 한껏 마금은 꽃향기가 차오른다.



  오늘은 또 어떤 잠깐!으로 꽃을 피워볼까.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진진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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