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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Aug 05. 2022

여름방학의 기특하고 시시한 짜장라면

  익숙한 하루는 빨리 지나가고 낯선 순간들이 가득한 하루의 속도는 느리기만 하다. 어떤 일주일은 ‘벌써’라는 말로 압축되고, 어떤 일주일은 ‘길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매듭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 일주일은 지루함, 노동, 예상 밖의 즐거움들이 차곡차곡 채워지느라 길기도 길다.      



   말이 길었다. 짧은 단어들의 조합으로 오늘의 나를 명료하게 설명하자면, 오늘은 8월 첫 주. 여름, 내 아이는 초등 1학년, 현재 나는 전업. 오늘은 여덟 살이 초등학교에서 방학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된 날이다.


  나는 온 여름을 집에서 보내는 초등학생과 함께이다. 이 낯선 시간들 덕분에 내 여름의 하루들은 느긋하게 흘러간다.



  밥하고,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하느라, 돌아서면 간식을 준비하느라 내 하루는 빼곡히 느리고 길다. 돌 밥 간식! 돌 밥 간식! 돌 밥 간식! 의 리드미컬한 노동은 참 요상하다. 돌 밥 간식의 시간은 참 빼곡히 긴 것 같은데, 돌 밥 간식! 과 이후의 돌 밥 간식! 의 사이는 너무 짧다. 아마도 그 사이의 시간 동안 지구가 엑셀을 좀 세게 밟아 도는 것이 분명하다. 지구도 밥 먹는 거 좋아하나. 아님 식후 땡! 간식을 좋아하나.       


    

  방학을 맞은 여덟 살 덕분에, 엑셀 좀 밟을 줄 아는 지구 덕분에 내 하루는 하나의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은, 아니 점심은 뭐 먹지?’

  ‘오늘 저녁은 뭐 해 먹지?’

질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알 수 있다던데. 나의 질문을 보니 나는 빈틈없이 엄마이다. 무얼 해 먹어야 하는지 리스트업도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고민하는,  여름 방학을 맞은 엄마이다.          



  온 하루를 함께하는 나의 아이는 아침도 먹고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어야 한다. 여름의 세찬 태양이 초록을 더욱 키워내듯 이 여름, 나도 아이를 진하고 푸르게 쑥쑥 키워내고 싶다. 초록의 엽록소를 잔뜩 머금은 싱그러운 초록도 한 움큼, 단백질도 담백하고 야무지게 쏙쏙 채우고 적당한 탄수화물로 너와 나 사이에 너그러움의 윤활유를 더하고 싶다. 양질의 영양소가 아이의 표정에 생기를 더하고, 반듯한 뼈와 탄력 있는 근육을 더해줄 수 있도록 내가 그 역할을 해내고 싶다.       


    

  나의 의욕과 반대방향에 겨우 서있는 나에게 요리란, 뭐랄까. 음, 내게 요리는 창의성의 다른 이름이다. 흔히 말하는 새로움인데, 그 새로움은 현재에 발을 붙이고 있는 새로움이다. 식재료와 소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제철의 초록과 해산물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이 익숙한(요리사에게만) 재료를 새롭게 보는 시선이 더해져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내는 탁월한 움직임이 더해진다면 이건 입안에 행복을 가득 채우는 맛있는 창의성이 되어준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맛은 이미 익숙한 맛에 길들여진 혀에 새로운 감각을 터치해준다. 그 새로운 맛의 터치는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감각을 발견하게 해 준다. 창의적인 음식의 영감은 그렇게 작게 찾아와 그 맛을 찾아가도록 새로운 길을 이끈다.       


   

  창의성이 새로움이라면, 나는 창의성과는 참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릴 적 나는 숙제 잘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다. 뛰어나서라기보다는 말을 잘 들었으니 혼 날일이 거의 없었다. 더욱이 주어진 숙제가 요구하는 것이 100%라면, 나는 반드시 105%를 해내야 안심하는 아이였다. 방학 동안의 탐구생활은 실험했던 결과들, 수집한 채집물들, 조사한 내용들로 본래 두께의 3배쯤은 부풀리는 그런 아이가 나였다. 내 탐구생활에는 활동결과나 조사자료가 붙어있지 않은 페이지가 없었다. 지금도 레퍼런스가 없으면 내 의견을 말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요리가 아마 숙제였다면 나는 성실히 해냈을 것이다. 탐구생활 덕후인 내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여름방학 요리 생활’ 책 한 권이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때 나에게

“자! 여름방학 요리 생활!입니다. 이대로 삼시세끼 해 먹으면 됩니다!” 하고 미션북을 던져준다면 나는 매 페이지마다 눈을 부릅뜨고 해냈을 것이 틀림없다. 방학 전, 미리 재료를 주문하며 숙제 준비를 했을 것이고, 만약 급히 재료가 없다면 하루 이틀쯤은 다른 날들의 요리와 순서를 바꾸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역시!’하며 나의 융통성을 스스로 칭찬도 해주었을 것이다. 여름날 화구 앞에서 땀을 흘리고 다리 아프게 서있으면서도 여름방학 요리 생활의 오늘 분량을 해냈을 것이다.  


 

  물론 유투브와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요리 능력자분이 업로드해둔 쉽고 근사한 레시피가 가득이다. 하지만 검색을 하려면 검색어를 알아야하지않나. 나는 검색어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게 '여름방학 요리생활'이 필요한 명백한 이유이다. 어떤 나라에는 '슬프다'라는 어휘가 없다고 했듯이 나는 요리 어휘와 관련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 맞다. 쥐어주세요...! 



  그러니까 갖고 싶다. 여름방학 요리 생활! 30일 분량. 하루마다 삼시 세 끼의 요리가 펼쳐진 책. 식재료는 여름의 감자, 고추, 쌀, 콩나물처럼 시시한 재료들만 나오면 좋겠다. 월계수 잎, 레디쉬, 루꼴라. 이렇게 동네 앞 마트에 없는 특별한 재료들은 내 주방과 동떨어져 보여서 시도하기가 겁난다. 1 티스푼, 200ml 이런 거 말고 어른 한 숟가락, 종이컵 하나로 계량하는 요리책. 하루의 메뉴들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여름을 건강하게 먹여주고 보여주는 요리. 내게 익숙한 재료들이지만, 그 익숙한 여름의 재료들의 조합으로 작은 새로움을 건드려주는 그런 요리들이 있는 그런 책이면 좋겠다.          



  아마 나는 아이와 그런 여름을 보내고 싶은가 보다. 누룽지나 시리얼, 짜장라면, 흰밥에 삼겹살, 그리고 초록의 상추쌈을 싸 먹는 그런 시시한 여름의 날들을 보내면서도 그 순간 풋! 하고 웃는 그런 여름 방학을 기대하고 있나 보다.           



  오늘도 나의 삼시 세 끼는 고민의 연속이다. 오늘도 동네 수영 학원에서 수업을 끝낸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아이에게 물었다.

  “점심 뭐 먹을까?”

돌아오는 메뉴는 늘 비슷하다. 짜장라면, 냉메밀국수와 알밥 외식, 소금 깨 주먹밥에 베이컨과 조미김 말이. 그래도 나는 늘 처음인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한다.

  “오늘은 짜장라면 어때?”

일주일에 한 번은 먹었던 메뉴인데도 마치 굉장한 점심 메뉴인 듯 나는 기대의 바람을 오버해서 불어넣는다.

  “오케이!”

  “있지. 오늘 짜장라면은 면수를 안 버린다! 국물이 좀 자작하게 있는 짜장라면이야. 지난주랑 비교해봐!”          


게다가 한 가지 더! 오늘은 반숙 달걀 프라이를 올려주었다. 달걀노른자를 안 먹는 아이는 볼멘소리를 한다.

  “엄마, 달걀노른자가 터졌잖아요!”

  “있지, 짜장면에  달걀노른자 반숙 터트려서 먹으면 진짜 맛있어. 이 노른자가 짜장면을 더 고소하게 감싸준다. 한 번만 먹어봐.”

  “엥...? 와! 진짜네! 저 이제 이쪽만 먹을래요.”

  “그치? 새롭지?”     



  오늘의 방학 점심 메뉴는 짜장라면이다. 익숙하고 시시한 짜장라면에 새로움  꼬집을 넣었다. 덕분에 재미의 풍미가 더해졌다. 아코! 쉽고 기특하기도 하지! 나의 여덟살은 마치 처음 먹는 것처럼 국물이 자작하고 노른자로 코팅된 짜장라면  젓가락을 후후 불어 먹는다. 노오란 단무지의 새콤함은 보너스.          



  올해 우리 집 여름 삼시 세 끼는 늘 이렇게 차려질 것이다. 익숙한 시시함에 내가 부릴 수 있는 새로움 한 꼬집. 이 새로움 한 꼬집은 참 기특해서 나도 뿌듯하고 여덟 살도 즐거운 젓가락을 움직인다.



  게다가 다행히 우리 집에는 달걀노른자에도 새로워하는 여덟 살이 산다. 이 여덟 살 형아는 그동안 편식을 해온 탓에 맛의 세계의 비기너이다. 너무 다행이다. 여덟 살과 함께 완성할 나의 시시한 여름방학 요리 생활은 어쩔 수 없이 오늘 저녁도 온고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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