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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Feb 13. 2023

아홉살이 집안에 뿌려놓은 마술

  “엄마! 이리 와봐요. 주윤이가 이층 침대를 만들었거든요. 보고 싶지요?”

  “주윤아, 엄마가 지금 드라이기로 머리카락 말리고 있어서 잘 안 들려. 조금만 있다가. “

  이 순간 우리는 자그마한 파우더룸 안에서 서로 들려도 안 들리는 중이다. 머리카락을 감은 직후는 반곱슬을 가진 내게 머리카락 말리기 골든타임이다. 반곱슬들이 제 기질을 발휘할 새를 주면 안 된다. 타월 드라이 직후에 드라이기가 윙~하고 건조하고 강력한 바람으로 반곱슬을 매정하게 다루어주어야 나는 사회생활이 가능한 앞머리를 가질 수 있다.



  “엄마, 엄마, 엄마! 제가 만든 이층 침대 진짜 궁금하지요? 이리 와봐요!”

  주윤이는 겨우 나와 세 걸음 정도 거리에서 다시 한번 말한다. 나도 들려도 안 들린 척하는데, 주윤이 역시 내 말은 들리지도 않고, 내가 지금 무얼 하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주윤이는 머리카락을 앞으로 다 넘겨 귀신처럼 얼굴이 머리카락 발을 쳐서 제 눈도 못 마주치는 내 상황은 보이지 않는다. 주윤이는 여전히 자기만 보면 다 보인다고 생각하는 천진한 어린아이이다.



  머리카락 사이로 힐끗 보이는 주윤이의 눈은 활기의 수분감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두 볼엔 기대가 맺혀 발그레 윤기를 띤다. 기대가 담긴 목소리의 맑은 명랑함은 결국 거센 드라이기 소음을 이길 수밖에 없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내가 보기에도 세상 초라한 몰골의 나에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표정과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난 결국 주윤이의 말도 다 들려버렸고, 얼굴도 다 보여버렸다.



  난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졌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줄다리기였음에 나는 오늘도 패자임을 기쁘게 확인한다. 나는 얼굴에 발을 쳐 놓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응! 진짜 궁금해. 엄마도 보러 갈래!”

주윤이는 그제야 세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파우더룸 밖으로 날 데려간다. 그리고 고작 도착한 곳은 세네 걸음 밖의 안방이다.



  안방엔 붙박이 옷장 2개 사이에 절반 높이의 서랍장이 있다. 침대를 마주 본 데다 중앙에 위치한 곳임에도 평소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이다. 요즘은 셋이 각자 이불 하나씩을 쓰고 있어서 이불을 개어 놓은 자리로 겨우 쓰는 공간이다. 그렇게 관심을 못 받던 그 자리가 오늘은 주윤이의 핫플이 되었다.



  “엄마! 봐봐요. 여기에 이불이 있잖아요. 여기에 제가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여기가 이층 침대예요. 어때요? “

  “우와! 멋지다. 어쩜 여기를 침대로 쓸 생각을 했어?”

  “멋지지요? 엄마 5점 만점에 몇 점이에요?”

  “음, 엄마는 4점. 왜냐면 엄마에겐 주윤이의 안전이 제일 중요한데 여기서 떨어지면 주윤이 다치겠잖아. 생각은 정말 멋진데, 위험해 보여서 4점!”



  5점이 아니어서 적잖이 실망한 주윤이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머리카락을 말리러 파우더룸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아직은 앞머리가 제멋대로 구부러지지 않았다. 휴~다행. 머리카락 말리기를 마무리하고 나가니 주윤이는 여전히 안방에서 요리조리 이불을 옮기고 있다. 귀여운 녀석. 나는 모른 체 부엌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내린다. 오늘의 새로운 원두는 에티오피아 시다모. 복숭아와 자두, 패션 푸룻의 가벼운 과실향이 나른한 일요일 아침의 무드에 스며든다. 이 나른한 부드러운 시간은 휴일 아침의 호사가 맞다.



  “엄마! 이리 와봐요. 주윤이가 다시 고쳤어요!”

  주윤이는 안방에서 나를 보고 손짓한다. 여전히 반짝이는 눈과 개구진 볼은 나를 이끈다. 안방에 가보니 우리 셋 각자의 이불 중 비교적 얇은 주윤이와 남편의 이불은 이층 침대 위에 개어져 있고, 구스가 빵빵해서 꽤 두터운 내 스모크핑크 이불은 바닥에 두툼히 깔려있다. 주윤이는 어릴 적부터 이 핑크이불을 핑크파티라 불렀었다.



  “엄마, 봐봐요. 바닥에 베개로 징검다리를 만들고, 이 층침대에서 주윤이가 떨어지면 안전할 수 있게 이 핑크파티를 깔았어요. 어때요?”

  “우와! 안전해졌네! 근데 주윤아! 이 핑크파티가 너무 폭신해서 주윤이가 떨어졌는데 퐁~하고 튀어 올라서 우주까지 날아가면 어쩌지? 나무집 시리즈처럼 말이야! “

  “에이~그럴리는 없겠지요! 오늘은 여기서 잘 까요?”

주윤이의 이 층침대는 붙박이와 붙박이 사이의 공간이라 1m 남짓의 너비이다. 1m 30cm의 주윤이는 목과 허리를 한껏 꺾고 굽혀서 겨우 들어갔다.

  “주윤아, 너비가 짧아서 목이랑 허리 아플 텐데.”

  “하나도 안 아픈데요! 잠깐만요. 여기서 좀 놀다 갈게요.”

  “응, 그래! 한번 해봐.”



  목과 허리를 펴느라 다리를 한참을 구부린 주윤이는 신이 나서 큐브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그래서 관심조차 없던 공간이 오늘 주윤이에게는 가장 재미있는 공간이 되었다. 늘 덮고 잤던 이불은 쿠션이 되었고, 좋아하던 핑크파티가 오늘은 내가 떨어지면 나를 재미있게 받아줄 분홍 트램펄린이 되었다. 침대, 이불뿐이어서 일상의 별거 없는 안방이 지금 이 순간 주윤이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상상의 공간이 되었다.



  주윤이의 천진한 명랑함이 깃들면 별거 없던 물건, 공간이 활기와 재미를 가진다. 세탁소 투명 비닐은 우주인 투명 헬멧이 되어 주윤이가 뒤집어쓰고 책을 읽기도 하고, 늘 걷던 보도블록도 주윤이와 걸으면 빨강은 밟으면 안 되어 한 발씩 점프하느라 내 발과 다리는 상투적인 걸음 대신 신선한 리듬을 갖는다. 주윤이가 이를 닦으러 가면 세면대 옆 수납장은 어느새 주윤이 의자가 되어 아직 땅에 닿지 않는 주윤이 발로 동동 발 리듬 소리를 내는 타악기가 되고, 그 자리에 있던 하얀 욕조는 주윤이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해피바나나 노래를 부르던 공연장이 된다.



  그렇게 아무리 눈에 익어 낡고 평범한 집안 공간도 주윤이의 명랑한 생각이 닿으면 그곳은 새것이 되어 살아난다. 그때부터 그곳은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품는다. 낡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힘을 품은 주윤이는 장난스럽고 자연스럽게 그 세상을 내게 열어준다.



  안방에서 나온 주윤이는 거실에서 세상의 모든 장난을 모두 머금은 미소를 온 얼굴 가득 피우고는 춤을 춘다. 위로 치켜뜬 눈에는 장난이 빼곡히 들어서있고, 말도 안 되는 노래에 맞추어 몸을 움직인다. 위아래로 맞춰 입은 베이지색 내복도 살랑살랑 리듬을 맞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즐거움이 뿜어져 나온다.



 “뭐가 이리 신날까?”

  옆에서 같이 눈을 치켜뜨고 주윤이를 향해 열손가락을 흔들며 장단을 맞춰주던 남편이 한 마디 한다.

  “그렇지? 너무 예쁘지. 우리에게 어쩜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가 왔을까. 즐거움을 나눠주니 너무 고맙지.”

  “그러네.”

  “남편, 잘 기억해 둬.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사춘기 되면 짤 없다.”



  주윤이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즐거움과 장난의 세계가 고맙다. 주윤이의 생각이 닿는 집안 구석구석은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놀이터가 된다. 주윤이 덕분에 시시한 집에 장난기 가득한 이야기가 담긴다. 결코 내가 갖지 못할 세상을 보여 전해주는 주윤이 덕분에 내 마음에 신선한 바람이 분다.



  이 아이는 친절하기도 해서, 나를 쉽게 장난과 재미의 세계로 데려가준다.

  “엄마, 그거 알아요? “

  “엄마, 어떤 거 알려줄까요?”

  “엄마, 여기로 와봐요.”

난 주윤이가 열어주는 세상에 들어가는 데 한 마디면 된다.

  “아니, 몰라. 뭔데? 알려줘.”

  “응, 엄마 알고 싶어. 알려줘.“

  “잠깐만. 엄마 이거하고 바로 갈게.”

  “아니야, 주윤이가 보여주는 거 먼저 보는 게 좋겠다.”



  이렇게 가벼운 한 마디는 주윤이는 마음에 쉽게 가 닿는다. 상냥한 주윤이는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맞추고 장난과 재미의 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너그러운 주윤이가 열어준 반짝이는 장난의 세계에 무임승차를 한다. 요즘 내게 가장 기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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