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낳는 과정도 힘들었지만, 낳고 나니 왜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지 알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결혼식 때에도 친인척이 조금씩 돈을 모았고, 결혼식 전 날 이것 저것 준비하는데 친정에 모여 다같이 도와줬다. 모든 것이 부족한 시기인 결혼식 때 십시일반 주위에서 조금씩 도와준 덕분에 결혼을 할 수 있는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기 역시, 나 혼자서는 절대 키울 수 없었다.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를 위해 부모님이 대신 아기를 봐주는 날이 필요했다. 신생아 때는 아기 전문가 선생님께서 오시고, 나는 계약직 얼마 남지 않은 출근을 마무리 하기도 했다. 아기가 어떤 식으로 소통하는지, 어떤 것을 필요로하는지 정보를 나눌 사람도 필요했다. 세상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따뜻한 눈웃음을 주던 이웃 덕분에 아기가 사회화가 잘 된 것 같다. 어린 아기 한 명을 키우기 위해 드는 노고가 어마어마 했고, 많은 사람의 관심이 모여야 하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생명 하나 하나는, 정말 귀하게 자랐다. 우리의 인생에서 각자가 주인공인 삶을 살았다. 그러다 아기를 낳고 나면, 적어도 아기가 어렸을 때에는 아기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고를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주 양육자가 배우자에게 어떤 말을 해도, 배우자는 주 양육자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아기는 더 심하다. 온갖 정성을 다해도, 이유를 모르게 떼를 쓰기도 하고 아프기도 한다. 내가 들인 노력에 항상 대가가 오지는 않는 것이다.
치즈덕 짤
데일 카네기는, 사람은 공통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이 부분이 해결되면 마찰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기를 양육할 때 당시에는, 노력을 인정 받기가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다음번엔 나의 우울했던 이야기를 적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