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인생 3n년차... 어렸을 때 소매치기 당하는 것을 많이 봐 온터라, 엄청 조심하고 다니는 내가 여권을 잃어버리는 날이 왔다. 최근에 아기 출생신고 때문에 부모 여권이 필요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여권을 쓰고 차에 넣어놨더랬다. 아이 둘이 갑자기 생기니 정신이 없던 탓에, 평소라면 바로 집 안전한 곳에 보관해놓았을 여권을 며칠간 차 안의 가방에 그대로 놔뒀었다. 밤이 오면, '아, 차에서 여권을 가지고 와야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집에 있는 아기들을 혼자 놔둘 수 없어서, 또 너무 피곤해 하는 남편에게 부탁하기보다는 낮에 가지고 오면 된다고 마음먹으며 여권 가지고 오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사단이 났다. 외출을 위해서 나 먼저 차에 갔다. 차 문을 열었는데, 조수석 글로브박스 안에 있는 카드들이 조수석에 널브러져있었다. 휴지도 몇 장 뽑혀있는게, 남편이 아기때문에 급하게 뭔가를 하다가 떠난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 도둑이 들었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있을 것 같은 일이 아니기에, 그냥 넘겼다. 남편이 자주 쓰는 안경닦이가 바닥에 떨어져있어서 '칠칠치 못하긴'이라는 생각을 했다. 비가 오는 날이라, 안경닦이가 다 젖어서 어쩌나 라는 생각을 했다.
잠시 후에 남편이 차에 도착했을 때, 현장을 보여주며 '무슨 일이야?'라고 물었더니, 남편은 바로 '도둑이 들었다'고 말했다. 운전자석에도 보니 조수석 글로브 박스에 있던 카드 일부분이 흩어져있었다. 일단 어떤 것이 없어졌나 확인해보았다. 그들은 다행히 신분증에는 관심이 없었다. 남편이 유일하게 발급받았던 신용카드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현금 100달러 정도만 사라져있을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없어진 것이 현금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차 뒷자석에 있던 가방이 있는지, 없는지는 딱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가방이 없어졌어'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남편이었다. 가방 안에 우리의 여권이 있는데.. 믿고 싶지 않았다. 일단 신분 도용을 당할 것이 가장 걱정되었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영사관에 전화하세요! 라는 문구가 떠올라서 얼른 전화를 걸었다. 점심시간이었다. 우리의 외출 목적이었던 신생아의 청력 검진 (1차 테스트에서 실패해서, 2차 테스트를 하러 가려는 길이었다)을 콧구멍으로 했는지 목구멍으로 했는지 귓구멍으로 했는지 (사실은 모두 아니다. 뇌파를 통한 검사다.) 인지하지도 못한 채 있다보니 점심시간이 지났다. 영사관 홈페이지를 여는데 왜 이렇게 팝업이 많은지, 로딩이 긴지.. 나보다 더 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지옥같은 기다림일까라는 상상을 했다. 영사관 홈페이지에서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10분 정도 알림음만 듣다가 직원과 연결이 되었다. 직원은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을 잡고, 방문한 다음에 분실신고를 해야 합니다. 공인인증서가 있으면 온라인으로 신고 할 수 있어요'라는 상투적인 말만 했다. 그 사이 누가 도용하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서둘러 예약을 잡으세요'라고 한다. 예약을 잡는 것도, 1개 혹은 2개가 아니라, 4개를 잡고 와야했다. 내 여권 분실 신고, 남편 여권 분실 신고, 내 여권 재발급 신청, 남편 여권 재발급 신청 총 4개의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전화 너머의 그녀는 '신경 쓰이시면 경찰에 신고하세요. RCMP라는 명칭인데, 찾아보세요 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경찰에 전화했다. RCMP라는 곳은 버나비에 많았고 내가 사는 이스트 밴쿠버 지역에는 잘 안보였다. 그래서 제일 가까운 곳인 버나비에 전화를 했더니 밴쿠버 지사로 전화하라며 바로 끊었다. 이렇게 불친절한 캐나다인은 처음봤다. 밴쿠버 지역의 RCMP를 찾기 어려웠다. 웃긴 것은, 구글 맵에 찾아보았더니 Work BC (police)라는 정보가 나왔다. Work BC는 완전 다른 기관인데.. 여기에 경찰서가 붙어있나? 싶어서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Work BC에서는 '우리는 일하는 것 관련한 업무만 지원하는데...'라고 했다. 나도 당연한 것을 어이없게 물어본 느낌이 들어서 얼른 끊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잠시만요 동료에게 물어볼게요'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서 경찰서 전화번호를 알아다 주었다. 자기가 직접 구글링해서 찾아준 것이었다. 후에 이 전화번호를 검색해보니 Vancouver police department 였다. 영사관에서 알려준 RCMP라는 곳을 찾느라 집착했다간, 쓸데없이 헛수고만 했겠구나 싶었다. 시큰둥한 영사관,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우리를 도와주려고 애써준 Work BC.. 의외의 순간이 이어졌다. 나는 영사관에서는 우리나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쓸 줄 알았지만, 내가 만났던 그들은 누구보다 '외국인'처럼 일을 했다. 예를 들어서, 아기 출생 신고를 한국에 해야했을 때에도, 한 달 이내로 하지 않으면 벌금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필요 서류가 캐나다에서 발급 받아야 하는 서류인데, 이것이 오피셜하게는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안내되어있는 서류였다. 담당자한테 어떻게하냐고, 한국에 출생신고가 늦어지지 않겠냐고 물어보니, 출생 신고를 늦게 해서 내는 벌금은 영사관에서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답변만 받았었다.
여하튼 어찌저찌 경찰관 전화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차에서 도난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추정 날짜, 장소, 어떤 차인지, 도난된 물품은 뭔지 등을 물어보았다. 차에 데미지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제서야 우리는 차의 상태를 아예 보지 않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차는 손상된 흔적이 안 보였다. 그래서 아마 우리가 차 문을 열어두고 그날 밤 집에 들어갔을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몇가지 꽤 디테일한 정보를 주고받은 다음에, 경찰관은 우리에게 '차 렌탈 회사에 전화해놓으세요, 그리고 보험에도 연락하세요'라며 다음 취해야 할 조치를 알려줬다. 렌탈 회사에는 왜 연락을 하냐고 물으니, 차에 손상이 갔을 수도 있기 때문에 본인이라면 만일을 대비해서 연락을 해놓겠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감동..) 보험의 경우도 차에 손상이 갔을 것, 또 이런 도난 사건에 대한 보상이 있는지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연락을 하라는 것이었다. (차 안에 다른 열쇠가 또 있었나요? 라고 물어줬을 때에는 꽤 놀랐다.) 경찰에 신고를 마치자 사건번호를 부여받았다. 우리가 줬던 여권 정보는, 나중에 이 여권을 찾았을 때 우리에게 연락을 해주려는 용도인 듯 했다. 이들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듯 했다. 여권에 대한 상세 정보를 주며 내심 기대했지만 당연히 한 번 떠나버린 여권은 찾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가방을 가지고 간 도둑도 우리 여권에는 관심이 없을 텐데.. 마음이 내내 안 좋았다. '여권을 돌려주세요'라고 적어서 차에 붙여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다른 사람에 의한 2차 피해를 받을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 남편은 여권보다 잃어버린 가방에 더 마음을 썼다. 아주 마음에 들고 잘 쓰던 가방인데 잃어버렸다며 슬퍼했다. 그 가방은 아기 기저귀 가방으로, 우리가 평소에 잘 쓰는 물건만 들어있었다. 도둑에게는 쓸모없는 물건만 잔뜩 있기에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매우 유감인 상황이었다.
우리는 가방을 집에 가지고 들어올 때가 많았다. 가방이 차에 있는 타이밍을 기막히게 알았던 그 도둑은 분명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리라. 여기에 이사온지 2달만에 차가 털리다니. 그것도 바로 집 앞에서 말이다. 우리 집은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있다. 어제 밤은 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날이었다. 그 날은 목요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직장인에게는 바쁜 날이었을 텐데 그 사람은 뭐하는 사람일까 궁금했다. 아마 근처 공원에 자주 가는 청소년 무리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 여권을 잃어버리면 아주 귀찮다는 것이다. 캐나다 비자, 미국 비자를 발급받아 놓은 터라, 여권을 잃어버리면 꽤 귀찮은 일이 많이 일어났다. 새로 여권을 발급받아야 하면 비행기표의 정보도 모두 바꿔야하고, 미국의 관광 비자는 새로 발급받아야 하고, 영사관에 들락거려야했다. 나의 경우, 5년 이내에 여권 분실 신고를 했던 적이 한 번 있기 때문에 여권 재발급 신청은 무조건 영사관에 가서 해야했다. (온라인 접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 6개월 이내에 찍은 사진을 요구하는데 이에 대한 증명도 필요로 했다. 또, 검은색/남색/흰색 계열의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은 안 된다는 문구를 보며 이들은 참 까다롭게도 일한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여태 왔다갔다 너무 외출을 많이 하고 있다는 걱정도 들었다. 이러다가 아기가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것은 마땅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P.S. 캐나다 현지 친구에게 '너는 왜 차에 블랙박스를 안 달아?'라고 물으니, '블랙박스는 비싸잖아. 누가 그거 훔쳐가고 싶어할까봐. 그런 건수를 일절 만들고 싶지 않아'라고 해서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