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한독의약박물관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동네 한의원을 종종 가곤 했습니다. 요즘이야 한의원에 안마 기구는 물론 현대식 의료기기까지 구비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우선, 한의원 문을 열면 진한 한약재 냄새가 코를 찔렀죠. 어른이 된 지금이야 그 한약 냄새를 건강해지는 향이라 말하겠지만, 그땐 한의원 문을 들어갈 때면 코를 막곤 했죠. 얼굴을 찌푸리며 들어간 한의원에는 커다란 나무 약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엔 어려운 한자들이 많았는데,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특유의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났습니다. 오늘 소개할 한독의약박물관의 유물은 바로 사람들의 건강을 염원하며 소중한 약재를 담아 보관했던 <경기약장>입니다.
약장(藥欌)은 약재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목재 수납장입니다. 약장을 만드는 나무로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와 습기에 강하고 방충효과가 있는 고급 목재인 오동나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약장은 여러 종류의 약재를 한 곳에 보관하기 위해 서랍이 많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적게는 10개에서 많게는 200개 정도까지 서랍을 달았고, 각 서랍마다 약재 이름을 새기거나 종이에 써서 붙였습니다.
약장은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게 발전했습니다. 그중에서 <경기약장>은 중앙관청에 소속된 수공업자(경공장:京工匠)들이 제작한 약장으로 주로 중앙의료 기관인 내의원(內醫院) 및 전의감(典醫監) 등에서 사용했습니다. 한독의약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경기약장>은 오동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폭이 25cm 정도로 좁고 날렵한 형태입니다. 약장은 ‘천판(윗판)’과 ‘몸체’, 다리 부분인 ‘족통’으로 크게 3 부분으로 구분되며 각각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방식으로 제작했습니다.
‘천판’은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판을 끼워 만드는 액자식 형태입니다. 틀에는 모서리나 면을 모양지게 깎는 ‘쇠시리’로 장식했습니다.
가구의 통풍을 위해 족통(다리) 가장자리를 뚫어놓는 풍혈(風穴)은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박쥐’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천판과 몸체, 족통을 결합한 후 모서리에는 귀장식, 연결부위에는 경첩 같은 ‘놋쇠 금속 장식’을 둘러 견고하면서도 세련되게 제작했습니다.
<경기약장>의 외형면에 86개의 서랍이 있고 여닫이문 안쪽의 서랍 6개가 있어 총 98종류의 약재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2종류의 약재명이 쓰인 하단 서랍은 안쪽이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큰 서랍에는 백개(白芥)나 곽향(藿香)처럼 자주 사용하는 약재를 담았습니다.
경기약장에 대한 당시 기록이나 남아있는 유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귀한 약재를 보관할 수 있는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약장은 주로 관청이나 전문의원, 양반가로 사용계층이 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는 부유한 상인 계층이 등장하면서 민간에도 다양한 형태의 약장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일생을 건강하게 보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원일 것입니다. 이는 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약과도 연결될 것입니다. 귀한 약재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한 가구, 약장. 우리 전통가구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도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던 선조들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