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허당약사
약국 문을 열기가 무섭게 들어오는 아침 손님들이 있습니다. 숙취 약을 찾는 분들이죠. 두통이 심하니 술 깨는 약이랑 타**놀을 달라고 합니다. 허당약사는 다른 두통약을 건네며 잔소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간이 힘들 텐데 아세트아미노펜을 먹으면 두통 잡으려다 간을 잡는 셈이에요.”
우리는 다음날 고생이 뻔한데 왜 술을 마시는 걸까요.
그래요 오늘은 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여기, 맥주 한 캔을 셋이 나누어 마시고 대취, 만취도 모자라 다음날 숙취로 힘들어하는 우리 집 세 남자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 있습니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술술 읊어지는 박목월 님의 ‘나그네’입니다. 특히나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구절은 해 질 녘 정겨운 시골 마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실제로 허당을 포함하여 사람들은 하루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만날 때, 서로의 어색함을 풀고 싶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트레스가 쌓일 때 술을 찾곤 합니다. 신기하게도 음식이 술을 만나면 풍미가 살아나고 사람과 술이 함께하면 경계를 허물고 한층 가까워집니다. 팽팽하던 긴장도 풀리고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기도 합니다. 참으로 다재다능한 신비한 액체입니다. 심지어 옛사람들은 약주(藥酒)나 반주(飯酒)라 부르며 벗 삼아 늘 옆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다면 술이 약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로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만 좋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죠. 술(알코올)은 약효를 무력화하거나 약의 독성을 크게 하여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그야말로 어떤 약과 만나도 술은 백전백승, 천하무적의 잔인무도한 킬러가 되어 버립니다. 정말 그러한지 알코올과 약물들의 상호작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해열진통소염제와 알코올
심각한 간 손상(아세트아미노펜)을 일으키거나 위출혈과 간 손상(아스피린, 이부프로펜 등 소염진통제)을 악화시킵니다. 기타 카페인 함유 식품, 세이트존스워트는 피하도록 합니다.
항알레르기 약과 알코올
중추신경을 억제하고 졸음을 배가시켜 위험합니다. 기타 과일주스(자몽, 오렌지, 사과)는 항히스타민제의 약효를 저하시키기 때문에 금기입니다.
위염, 위궤양 약과 알코올
알코올은 위염을 악화시키므로 금주해야 합니다. 카페인 함유 식품, 자극적인 식품도 피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 제산제는 과일주스와 탄산음료 피해야 합니다.
혈압약과 알코올
혈압강하 작용을 증강하여 저혈압을 일으킵니다. 기타 약물 계열에 따라 칼륨 함유식, 자몽주스, 세이트존스워트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콜레스테롤 약과 알코올
간 손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타 자몽주스, 세이트존스워트는 피하는 게 좋습니다.
당뇨약과 알코올
혈당을 떨어뜨려 저혈당을 일으킬 수 있으니 금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항생제, 항결핵제와 알코올
약효를 소실(테트라사이클린) 시키거나 간독성(항결핵제)을 일으킬 수 있으니 치료 중에는 금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좀약(항진균제)과 알코올
홍조, 발진, 부종, 구토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타 자몽주스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신질환약과 알코올
부작용을 과도하게 증강시켜 환자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기타 세이트존스워트, 자몽주스, 카페인은 약효와 독성에 크게 작용하므로 피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식약과 알코올
메스꺼움, 구토, 두통, 과민성 같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기타 카페인 함유 음식, 세이트존스워트, 고지방. 고탄수화물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골다공증과 알코올
칼슘 배설을 촉진하여 골다공증을 악화시킵니다. 기타 카페인 함유 식품(초콜릿, 커피, 차), 탄산음료, 고지방식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통풍과 알코올
요산 합성 증가와 요산 배설 억제로 혈중 요산 농도를 증가시킵니다. 기타 퓨린이 많은 음식(고기, 등 푸른 생선, 조개, 새우 등)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위에서 ‘세이트존스워트’라는 성분은 생소할 것입니다. St. John’s wort (히페리시, 성 요한 풀) 추출물은 주로 갱년기 증상 완화에 사용됩니다. 간에서 CYP-450 대사효소를 유도하는 성분이라 다른 약물의 혈중농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특히 다른 약들과 상호작용이 커서 주의해야 합니다. 식품으로도 나오고 있으며 시중에 판매되는 약으로는 훼**큐가 대표적이므로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밖에도 무수한 상호작용이 있으나, 술과 약이 얼마나 악연인지는 이상의 내용만으로도 확실해 보입니다. 지금 복용 중인 약이 있다면 조심해야 할 음식에 대해서 약사, 의사와 꼭 상의해 보시기를 적극 권장드립니다.
참고로 식품의약품안전평가원에서 발행한 복약안내서를 읽어 보시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환자는 술을 멀리해야 하는 안타까움으로 고개를 떨굽니다. 잠시 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합니다.
“그럼 담.배.는. 괜.찮.나.요?”
뛰는 술 위에 나는 담배의 해악에 대해 일장연설을 마친 허당은 갑자기 심한 갈증을 느낍니다.
그날 저녁, 곧 건강검진이라 냉장고 깊숙이 숨겨 놓았던 맥주캔이 발이 달렸나 어느새 손 안에서 냉기를 뿜고 있습니다. 따악!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청량한 소리가 납니다. 아무래도 건강검진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