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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Ji Sep 07. 2022

2022년 3월, 제주 선흘리의 어느 날

평소처럼 일하던 날의 일기

J의 기록


2022년 3월, 제주 선흘리의 어느 날


수요일 오전 9시 45분. 오늘 나를 태우느라 수고한 진달래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고 엉거주춤하게 땅에 발을 디뎠다. 워케이션이 끝나기 전에 조금은 승마에 능숙해지려면 부지런히 레슨을 들어야 했다. 승마장 언덕을 내려와 장비를 벗고 나면 대략 50분이 되고, 그대로 차를 달려 숙소로 돌아가면 10시가 조금 넘는다. 급히 뛰어들어온 숙소에는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영화를 본 뒤로 듣고 또 듣고 있는 오만과 편견 OST 였다.


숨을 잠시 돌리고 출근 버튼을 누르는 시간은 보통 10시 20분 정도였다. 이미 출근을 마친 B가 졸린 눈으로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지나가며 보이는 익숙한 화면을 보며 말했다.


"오늘 오전에 회의 있어요?"

"아녀..."


대답은 네 일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터블 모니터에 흐릿하게 비치는 Slack 화면을 훑었다. 새로운 알림이 온 스레드는 없는지 보는 것, 보통 내 업무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마저도 곧 집중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30분.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려고 해도 쉽지 않은 시간이다.


내 시선을 자연스레 창 밖으로 향했다. 탁 트인 하늘, 아직은 메마른 느낌이 나는 색이 사이사이에 섞여있는 제주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날이 맑은 날에는 저 멀리 함덕 바다가 보인다. 비현실적인 나의 현실이다.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수요일은 스크럼도 오전 회의도 없는 날이다. 12시가 가까워질 때쯤 나는 고개를 뒤로 빼고 B에게 물었다.


"오늘 점심 뭐 먹을까요?"

"저희 뭐 남았죠."


B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를 열고 유심히 살펴본다. 굶어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우리는 썩 잘 챙겨 먹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니, 너무 잘 챙겨 먹어서 튼튼해지는 중이었다. 남을까 걱정하면서 첫날 샀던 커다란 김치 봉투가 바닥을 드러내고, 많다고 걱정했던 야채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덕분에 3일에 한번 꼴로 하나로 마트를 들락거렸다.


"두부 있고, 만두도 있고, 오늘 두부찌개 먹을까요?"

"계란 있으면 계란말이도 해야겠다."

"좋아요."


만족스러운 메뉴다. 여기 와선 대충 먹은 날이라곤 없었다. 누군가 함께 일상을 꾸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좀 더 정성을 들여서 보기 좋게 만들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혼자서 먹을 때도 잘 챙겨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여기서 처음으로 했다. 잘 먹어야 기분이 좋크든요.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면 한 명이 먼저 싱크대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시작한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점심에 재활용이랑 음쓰 버리고 올까요?"

"좋아요."


제주는 쓰레기 처리장 설치가 잘 되어있는 곳이었다. 제주 여기저기에 관리자가 상주하는 분리수거 시설이 존재했다. 우리 숙소에서는 차를 타고 2분 거리였다. 숙소에 쌓인 쓰레기를 처리하고 짧게 주변 산책을 하고 다시 업무로 복귀한다.


"안녕하세요~."


애써 텐션을 높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2시 회의를 시작한다. IT업계가 대부분 이렇겠지만, 업무시간에 회의시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다. 가끔 B와 내가 다른 회의에 들어가 동시에 발언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숙소 공간이 좁지 않고,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 덕분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는 것으로 회의는 무리 없이 진행이 가능했다.


"끝났어요?"

"네. 근데 좀 고민되는 게 있는데요."

"뭔데요?"


가끔은 고민되는 논의를 끌고 와 B에게 털어놓고 머리를 함께 맞대는 일도 있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 함께하는 재택근무의 특장점이었다.


"베카신남은거 먹을까요."

"좋아요."


베카신. 우리가 선흘리에서 지내는 동안 '또카신'이라는 말을 만들어 쓸 정도로 사랑에 빠진 디저트 가게였다. 가서 먹는 것으로 부족해 포장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당이 떨어질 때 꺼내 먹곤 했다. 바쁘지 않은 날에는 커피와 차를 내려 짧게 바깥 풍경을 즐겼다.


"오늘 해질 때 예쁠 것 같아요."

"그래요?"


어느새 노을 감별사가 다 된 B는 하늘을 보고 그날 노을의 상태를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예측이 틀린 적은 없었다.


"30분 일찍 퇴근 고?"

"고."


1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작은 오름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노을이 잘 보이는 시간에 맞추려면 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숨이 턱이 차도록 뛰어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아름다운 하늘은 봐도 봐도 아쉬운 장면이었다. 저녁에 노을을 보러 가기로 한 날이면 일하는 내내 발을 동동 구르곤 했다. 빨리 노을을 보고 싶어서. 


업무 시간 내에 쌓였던 잔잔한 짜증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 나는 제주에 있다. 여기 있는 동안은 언제든지 자연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내 일상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뒷골을 자극하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달려간 오름에서 본 노을과 비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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